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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메추리와 이삭

  • 심형철 박사·국제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전공 교수
기사입력 2024.09.25 06:00
  • 오곡은 무르익고 들판은 풍성하다. 이맘때의 풍요로움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했는데, 올해 추석에는 여름의 뒤끝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을은 깊어져 가고 이삭은 고개를 숙인다. 가을의 풍요와 여유를 그림으로 만나보자.

    전통 그림의 주연 혹은 조연으로 등장하는 조류(鳥類)를 생각하면, 대개 위엄을 자랑하는 독수리와 매, 기다란 다리를 자랑하는 학과 백로, 물 위를 떠다니는 오리와 원앙, 작지만 친근한 까치와 참새 등을 떠올린다. 

    혹시 전통 그림의 주인공으로 메추리를 본 적이 있는지 묻는다면, “글쎄, 메추리가 그림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의문이 든다.

    메추리는 작기도 하지만 화려하지도 않고, 울음소리가 아름답지도 않다.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완용으로 기르지도 않는다. 메추리는 메추리알을 먹을 때만 그 이름을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메추리가 주인공인 전통 그림의 속뜻을 알고 나면, 메추리를 다시 보게 된다.

  • (왼쪽) <추순탁속(秋鶉啄粟)>, 최북, (오른쪽) <세세평안도(歲歲平安圖)>, 진지불 /출처=<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도서출판 민규
    ▲ (왼쪽) <추순탁속(秋鶉啄粟)>, 최북, (오른쪽) <세세평안도(歲歲平安圖)>, 진지불 /출처=<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도서출판 민규

    그림 <추순탁속(秋鶉啄粟)>을 보자. 제목을 풀어쓰면 “가을날 메추리가 조 이삭을 쪼아 먹고 있다.”이다. 이 그림의 작가는 조선의 최북(崔北)이다. 메추리를 하도 잘 그려서 별명이 최메추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메추리를 아무리 잘 그려도 제목만 보고는 그림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 

    그림 <추순탁속>에서 메추리 한 마리는 이삭 줄기를 바라보고, 다른 한 마리는 떨어진 이삭을 쪼아 먹고 있다. 메추리는 한자로 암순(鵪鶉, ānchún)이다. 메추리 암(鵪, ān)은 편안할 안(安, ān)과 중국어 발음이 같고 우리말 발음도 비슷하다. 그래서 메추리는 평안(平安)을 상징한다. 그리고 쪼아 먹는 곡식은 조 이삭인데, 흔히 좁쌀이라고 한다. 조를 포함하여 곡식 낟알이 열리는 식물을 통칭 한자로 화(禾)라고 한다. 화(禾)는 화목할 화(和)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조 이삭은 화합을 상징한다.

    그래서 메추리와 조 이삭을 그린 그림은 “편안하고 화목하게 사세요.”라는 뜻이고, 이런 그림을 <안화도(安和圖)>라고 한다. 

    그림 <세세평안도(歲歲平安圖)>를 보자. <안화도>와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안화도>가 아니라 <세세평안도>다. 두 그림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림 속 메추리가 이삭 아래에서 가을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삭을 한자로 수(穗, suì)라고 하는데, 해(세월) 세(歲, suì)와 중국어 발음이 같다. 메추리 머리 위로 이삭이 두 줄기다. 그래서 세세(歲歲, suìsuì)라고 읽고, ‘해마다, 영원히’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메추리가 한 마리면 이삭 줄기도 하나, 메추리가 두 마리이면 이삭 줄기도 둘을 그린다. 메추리는 <안화도>와 마찬가지로 평안(平安)으로 읽는다. 그래서 이 그림은 “해마다 평안하세요.”라는 뜻이 된다.

    두 그림을 읽는 방법이 작가에 따라 다르지만, 그 뜻은 모두 평안과 화합을 기원하고 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가을, 메추리와 이삭을 그린 그림을 감상하면서 평안과 화합을 기원해 보자.

    ※ 본 기사는 기고받은 내용으로 디지틀조선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심형철 박사·국제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