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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머루 빛 포도가 탐스럽다. 포도는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먹어야 제맛이다. 저장성이 좋지 못해 쟁여 두고 먹기엔 부적합한 과일이라 지금 먹지 않으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몰래 훔쳐 먹는 서리가 용서되던 그 시절, 포도가 익어갈 즈음이면 포도밭에 널린 포도송이에서 잘 익은 포도알을 골라 몰래 떼어먹던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조선 시대 많은 문인이 포도를 즐겨 그렸다. 먹의 농담(濃淡)만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입에 군침이 돌 정도로 멋지게 그렸다. 모양이 예뻐서 맛이 좋아서 포도주가 좋아서 그린 것은 아닐 텐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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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포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이다. 익어가는 포도 한 알 한 알에서부터 잎사귀와 가지, 덩굴손까지 너무나도 섬세한 솜씨다. <포도이숙(葡萄已熟)>-포도가 이미 익었다-은 심사정의 그림이다. 심사정은 포도와 인물을 잘 그렸던 정유승(鄭維升)의 외손자이며, 포도 그림으로 유명한 심정주(沈廷胄)의 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심사정의 포도 그림은 물론 그의 그림 모두가 당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포도는 덩굴식물이다. 덩굴은 한자로 만대(蔓帶)인데, 영속성을 의미하는 만대(萬代)와 발음이 같다. 더구나 포도는 한 송이에 수십 알의 포도가 달려있고, 포도알마다 씨앗도 여러 개를 품고 있기 때문에 자손 번성, 즉 다산(多産)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인들이 포도를 그린 이유가 오로지 다산이었다면 내로라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심혈을 기울여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명나라 문인이자 화가인 악정(岳正)의 《유박고·화포도설(類博稿·画葡萄说)》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원문을 우리말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줄기가 수척한 것은 청렴(廉), 마디가 굳센 것은 강직(刚), 가지가 약한 것은 겸손(谦), 잎이 많아 그늘을 이루는 것은 어짊(仁), 덩굴이 뻗더라도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은 화목(和), 열매로 술을 담글 수 있는 것은 재주(才), 맛이 달고 독(毒)이 없어 약재에 들어가는 것은 쓰임(用), 상황에 맞게 굽히고 펴는 것은 도(道)이다. 포도가 이와 같이 덕을 완전히 갖추었으니, 마땅히 매화, 난, 국화, 대나무와 경쟁할 만하다.”
포도의 상징성이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식물에 빗대어 그린 사군자 매란국죽(梅蘭菊竹)과 견주어도 절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두루 지닌 포도, 그래서 조선의 선비는 포도를 더욱 멋지게 그리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그만큼 멋진 작품을 많이 남겼다.
※ 본 기사는 기고받은 내용으로 디지틀조선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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