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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바로 직전에 찍었던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속 이정재는 패션의 끝판왕이었다. 앞도 뒤도 보지 않고 누군가를 사냥해야 하는 레이의 성격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주얼적으로 표현했다. 화려한 의상, 액세사리, 헤어스타일 등이 이정재를 감쌌다. 그런 그가 바로 다음 작품에서 초록색 운동복을 입고 등장했다. 가장 밑바닥의 모습, 이정재는 가장 격차가 큰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완벽하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게임' 등 어린 시절에 하던 게임을 담고 있다. 그 게임에는 큰 빚을 지거나 삶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456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게임에서 이기면 456억 원을 갖게 되고, 지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이정재가 맡은 기훈은 회사에서 일방적인 해고를 당한 뒤, 자영업을 하다 망하고, 그렇게 빚을 엊게 됐다. 그리고 실 같은 희망으로 경마장을 전전하다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처음 '황동혁 감독님이 주신 시나리오'라고 소속사를 통해 받았어요. 감독님과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기쁘게 받았는데, 읽어보니 더 흥미진진하더라고요. 제가 맡은 기훈 역시, '오징어 게임'에 참가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라던가 상황, 심리 등이 너무나도 잘 묘사가 되어있었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합류하게 됐습니다." -
앞서 말했듯이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속 레이와 기훈은 정말 정반대인 인물이다. 이정재는 "다음 작품을 고를 때, 바로 전작품과 전전작품에서 했던 캐릭터와는 다른 상반된 캐릭터를 고르려고 하는 성향"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기훈을 선택한 것에는 커다란 기회비용이 따랐다. 이정재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촬영 당시, 한쪽 어깨가 파열됐다. 과거 영화 '빅매치'(2014) 촬영 당시 파열된 어깨의 반대편 어깨가 다친 것이다. 병원에서는 빠른 수술을 권했다. 하지만,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을 택했다. -
"'빅매치' 때는 바로 수술을 했어요. 그때 병원에서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해서 다음 약속한 작품을 못 하게 된 경험이 있어요. 좀 후회가 남더라고요. 이번에는 조금 더 버티고, 나중에 수술하는 거로 결정을 했어요. '오징어 게임' 끝난 후에 수술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헌트'라는 작품의 촬영이 시작돼 아직도 못하고 있습니다."
"촬영 당시 양쪽 어깨가 다 안 좋으니까 힘을 과도하게 쓰는 액션은 동작을 조금 바꿔서 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어쨌든 촬영은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해야 하니까요. 촬영 도중에 어깨 파열 부위가 더 벌어지면 팔을 못 쓰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많이 조심해서 촬영했습니다. 매 게임 특성이 달라서 모두 기억에 남지만, 유리 다리 위를 건너는 것은 100% 안전이 보장된 세트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유리 위를 뛰어다니다 보니, 많이 긴장되더라고요. 땀이 정말 많이 났습니다." -
이정재는 구슬치기 게임을 가장 잔인한 게임으로 꼽았다. "설정이 굉장히 잔인하게 느껴졌고, 그 게임이 아마 모든 연기자에게 가장 감정적으로 무거운 장면이 아니었나 싶어요"라는 설명이다. 반면, 달고나 게임에 임할 때는 "이렇게까지 핥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기훈이 목숨을 걸고 살아야하는 절박함을 표현하기에는 가장 최선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촬영할 때도 굉장히 재미있게 했어요"라고 밝히는 그다.
망가짐도 불사했다. 이정재는 "스타일 적으로 제 의견을 많이 안 내는 편"이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이어 "스태프들은 매 작품 바뀌시니까, 그분들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제안을 소화하려고 노력하는 쪽으로 작업하고 있고요"라며 이유를 설명한다. 기훈의 빨간 머리 역시 이정재의 표현 그대로 "스태프들의 의견에 10,000%" 따른 결과였다.
"빨간 머리도 감독님이 처음부터 설정하셨는데요. 기훈이의 내면도 보일 수 있는 강렬한 색이라서, 하는 데는 한 번도 다른 의견을 낸 적이 없었고요. 빨간 머리를 '스프레이로 할까, 염색할까, 가발을 쓸까'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서대로 찍지 못해요. 마지막 장면을 찍었다가 초반 씬 찍을 수도 있고 왔다갔다 찍는 경우가 많아서요. 염색하면 다른 장면을 찍기 어려워서 가발을 선택해서 가발을 새로 맞춰서 쓰게 됐죠." -
전 세계적으로 '오징어 게임'이 인기를 끌며 시즌 2를 기다리는 목소리가 크다. 이정재는 어떻게 생각할까.
"저희가 촬영할 때도 '시즌 2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준비하셔야죠'라고 쉬는 시간에 이야기했었는데요. 모르겠어요. 감독님이 어떤 또 다른 아이디어로 하실지, 전혀 모르겠어요. 기훈이가 다시 그 게임장으로 들어갈지, 그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서 응징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저는 시즌2에 기훈이라는 인물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가서 열심히 해야겠죠."
이정재는 어느덧 데뷔 30년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영화 '관상')이라고 외쳤던 적이 있고,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영화 '암살')라며 결백을 주장하기도 했고, 여전히 묵묵히 누군가를 바라보는 보디가드 재희(드라마 '모래시계')의 모습도 오간다. 여기에 전세계 190여 개국에서는 달고나를 열심히 녹이는 성기훈의 모습까지 추가됐다. 그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다.
"매 작품 하나하나가 저 개인적으로는 많이 소중하고요. 큰 성공보다는 이 작품을 만든 의미와 진정성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작은 희망이었는데요. '오징어 게임'이 이렇게 큰 흥행도 하고, 그 안에서 저희가 보여 드리려고 했던 메시지나 재미, 이런 것들을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있는 관객분들이 너무 잘 이해해주시고 즐거워해 주셔서 또 다른 큰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 작품이죠. '오징어 게임'으로 인해서 '제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큰 계획은 없고요. 저에게는 그냥 좋은 감독님, 스태프들, 호흡이 잘 맞는 배우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조금 더 만약 기대를 한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나올 한국의 K영화, 드라마가 좀 더 다양한 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죠."(웃음)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