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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승'은 우승이 아닌 1승을 이야기하는 묘한 스포츠 영화다. 한국 영화 최초로 '배구'를 소재로 한 작품은 한 사람의 실패담으로 문을 연다. 한때 배구 유망주였지만, 파직, 파면, 파산, 퇴출, 이혼까지 모두에서 실패한 감독 김우진(송강호). 그에게 "중요한 건 스토리"라며 "1승만 하면 된다"라는 재벌 2세 괴짜 구단주(박정민)이 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을 제안한다. 핑크스톰의 선수들도 감독과 다르지 않다. 에이스인 선수는 몸값을 높여 이적했고, 남아있는 선수들은 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다. 과연 이들은 우승이 아닌, '1승'을 할 수 있을까.
송강호는 모든 것을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김우진 감독 역을 맡았다. 그는 그 어느 작품보다 자신을 낮추고 김우진과 눈높이를 맞춘다. 그러면서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아래가 절벽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아래에는 시냇물도 흐르고, 잔디도 있고, 나무도 있다'라는 것을 몸소 알려준다. 처음에는 앉아서 지는 경기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던 그가 점점 몸을 일으켜 세우고, 경기 중 1점에 다리가 풀리는 모습은 점점 핑크스톰에 몰입하게 되는 그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를 통해 송강호는 늘 그렇듯 관객을 가장 들썩이게 하고, 가장 스크린과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간다. 선수의 마음을 가장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감독처럼 말이다. -
Q. 배구라는 스포츠의 팬으로도 유명하다. '1승'에 출연한 이유와 팬으로서 작품에 담긴 배구 경기가 만족스러우셨는지 궁금하다.
"'와, 배구 영화다! 출연해야겠다!'라는 느낌은 아니지만, 배구라는 스포츠가 주는 다양함을 알고 있고, 한국 영화 최초로 배구를 소재로 한 작품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신연식 감독님께서도 '배구를 카메라에 담는 것이 너무 어렵다'라고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촬영하고, 그 모습을 담아내는 것을 볼 때 굉장히 신선하고 좋았다. 누구나 성공하고 멋진 슈퍼스타가 나오는 대본은 아니다. 열정은 넘치지만, 현실이 그 열정을 감싸주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도 모르게 자신감을 잃고 항상 패배 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자극을 받고, 일어서는 모습이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선수들을 야단치는 김우진의 모습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야단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이 더 뜨거웠다. 선수와 감독이 같이 성장하는 느낌이 참 좋았던 것 같다."
Q. 사실 배우 송강호라고 하면 한국 영화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대배우'로 자리하지 않았나. 그래서 언더독의 이야기에 어떻게 이입했을지 궁금했다.
"사실 김우진은 영화 속 캐릭터지 않나. 하지만 살다 보면 누구나 김우진 같은 마음이 있다. 뭔가 답답하고,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이런 경우가 저에게도 있고, 관객분들에게도 있을 거다. 그래서 무대인사를 하면서 관객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렸다. ''한 번 이기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승'이 100승이, 1,000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극장 문을 나설 때, 나에게 1승이 뭘까 생각한다면 가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내년이면 제가 배우가 된 지 30년이 된다. 그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다 보면 어떤 때는 뭘 해도 잘될 때가 있다. 반면, 어떤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관객과 소통이 부족한 구간이 나온다. 가만히 보니 '이게 인생이구나' 싶다. 누구에게나 좋은 때가 있고, 그런 구간이 지나면 어려움도 있고, 그 리듬 자체가 인생의 축소판이다. '1승'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Q. '1승'의 묘미는 김우진 감독이 점차 핑크스톰의 경기에 몰입해가면서, 관객도 그 경기에 몰입해간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다리 풀리는 연기는 압권이었다.
"제 아내가 제일 싫어하는 연기가 다리 풀리는 연기였다. (웃음) '1승'에는 익살과 풍자가 저변에 깔려있다. 애니메이션도 그런 일환이다. 관객분들에게 '이 영화는 팝콘도 드시면서 즐겁게 봐도 되는 영화입니다'라고 말해주는 장면 같았다. 풍자와 해학인데, 아내는 다리 풀리는 연기를 별로 안 좋아하더라. 사실 그런 장면이 몇 개 더 있었다. 편집돼 완성된 '1승'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인데 방수지(장윤주) 선수가 김우진 감독의 뺨을 탁 때리고 지나가는 장면도 있었다. 아마 감독님께서 '이건 좀 과하다' 생각하셔서 편집하신 것 같다. 그런 풍자와 해학이 현장에도 있었다. 대본에 없는 장면을 선수들과 같이 만들어 나갔다."
Q. 배구 팬으로서 '1승' 속 경기 장면을 보며 남다른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다른 스포츠도 좋아하지만, 예전부터 배구를 좋아했다. 파워, 에너지부터 세밀한 작전과 그걸 수행하는 팀워크까지, 복합적인 재미가 너무너무 좋다. 제가 방수지(장윤주) 선수에게 한 말이 실제 GS칼텍스 차상현 전 배구 감독이 선수에게 지시한 걸 그대로 따라 한 건다. '네가 조금 전 실수한 게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으면, 계속 실수하는 거라고' 한 장면이다. 선수의 머릿속에 있는 심리적인 것까지 감독은 다 파악해야 한다. 실수가 다음 플레이에도 영향을 미치면, 감독은 그것을 파악하고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그대로 연기했다. 참 의미가 있는 장면이다. 선수들의 서브나 기술 등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선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있어서 잘 풀리지 않는지까지도 감독은 알아야 한다." -
Q. 배우 송강호에게도 '1승'이 간절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이 영화 '초록물고기' 때였다. 데뷔한 작품은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었는데, 그때는 3일만 촬영한 단역이었다. 그런데 '초록물고기' 찍을 때는 배역이 컸다. 캐스팅 당시 공연 중이었는데, 공연 측에서도 영화에 제대로 올인해보라고 배려를 해주셨다. 그리고 그 작품이 1997년에 개봉했다. 이창동 감독님께도 감사드리고 싶다. 영화 연기를 제대로 하면서,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굳이 따지자면 이 작품이 제 인생에 '1승'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Q. 지금 배우 송강호가 바라는 '1승'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
"'1승'이 관객분들에게 사랑받으면 좋겠다는 것이 가장 큰 존재다. 그리고 앞으로도 좀 더 제 마음에 고동을 치게 하는 작품들을 만나면 좋겠다. 그게 드라마든, 영화든,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것이 제가 바라는 '1승'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여전히 매번 긴장되고, 두근두근하고, 처음 촬영하기 전날에는 잠이 안 올 정도로 두렵다. 장난 아니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자극이 없으면 안 된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도 마찬가지 일 거로 생각한다." -
Q. 올해는 디즈니+시리즈 '삼식이 삼촌'으로 드라마 '신인배우'라는 타이틀도 달아봤고, '1승'이라는 의미 있는 작품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어떤 해로 기억될까.
"저는 참 드라마틱한 한 해를 보낸 것 같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드라마와 영화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고, 많은 인물을 연기하고 마주할 수 있었다는 자체가 좋았다. 결과까지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결과를 떠나 드라마 속 삼식이, 영화 속 김우진이라는 캐릭터를 만나게 된 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도전이었고 작은 성취였던 것 같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