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영화, 드라마에서 '이병헌' 석 자는 흥행 보증수표로 꼽힌다. 안면 근육까지 연기하는 섬세한 표현력에 대체 불가능한 캐릭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를 골랐을 땐 가장 먼저 궁금증이 떠올랐다. 바둑이라는 정적인 스포츠로 어떻게 재미를 끌어낼 것인가 하는 호기심이었다. 크랭크업 한 지 4년 만에 베일을 벗은 '승부'는 바둑보다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한 드라마틱한 이야기였다. 이병헌 역시 이런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매료돼 '승부'를 택했다. 영화 개봉을 앞둔 지난 21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이병헌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승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이병헌)이 제자 이창호(유아인)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작품은 2021년 크랭크업 한 후 개봉을 기다리다 팬데믹과 주연 배우 유아인의 마약 논란이 연이어 터지며 우여곡절을 겪었다. 극장 개봉이 불투명해진 상황에 그도 막중한 부담감을 느꼈을 터다. 와중에도 이병헌은 "가장 힘드신 건 감독님이셨을 것", "현 상황에서는 유아인, 그 친구가 많이 힘들지 않겠나"라며 배포를 드러냈다. -
Q. 영화 '승부'가 크랭크업한 지 4년 만에 관객을 만나게 됐다. 그동안 주연 배우로서 걱정도 많았을 것 같다. 개봉 소감이 어떤가.
"영화 할 때마다 떨리는 건 있지만, 이번에는 정말 신났다. 우여곡절을 겪어 그런지 이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OTT로 간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확실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지는 것에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Q. '승부'가 실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데다 바둑 소재지 않나. 어떤 매력에 끌려 작품을 선택했나.
"제 작품 선택의 기준은 저에게 주는 재미다. 되게 주관적일 수 있는데, (대본이) 나를 만족시키는 게 중요하다. 캐릭터보다는 이야기를 보고 결정한다. 출연을 결정하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어떻게 이게 실화일까' 싶었다. 거짓말 같았다."
"제자에게 처음으로 패배한 후에 느끼는 조훈현의 감정이 '승부'의 가장 핵심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당혹스러움도 있었을 테고 허망함도 있고, 다시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하는 자신을 대하는 감정과 묘한 집안의 분위기. 이렇게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가 이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
Q. 실제 바둑의 전설로 불리는 조훈현 국수를 연기했다. 실존 인물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을까.
"실제 있던 사람, 역사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건 늘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조훈현 국수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분이지 않나. 아무래도 실제 인물이니 기댈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또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런 양면성이 존재한다. 그분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내가 흡수할 수 있다는 것, 외형적인 모습과 눈빛, 여러 버릇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건 분명 장점이다. 하지만 픽션으로 창조하는 부분에서는 그 안에서 놀 수 있는 게 제한적이기도 하다."
"외형적인 싱크로율을 위해서는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방대했다. 많은 부분을 비슷하게 가려고 애를 썼다. 헤어나 분장도 그렇다. 사실 (조훈현 국수와) 제 눈썹 위치가 좀 다르더라. 그래서 제 눈썹을 살색으로 살짝 지우고 위로 눈썹을 그리기도 했다. 그래서 '승부' 속 저를 보시면 '인상이 좀 변한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다."
Q. '승부'에서는 유아인을 비롯해 처음 호흡을 맞춘 배우들이 많았다. 현장은 어땠나.
"이번에 처음 같이 해보는 배우들이 많았다. 현봉식 씨, 고창석 씨, 문정희 씨, 유아인 씨 다 그랬다. 연기하면서 신이 나는 그런 느낌이 있다. '어 이거 재밌겠는데'하는 마음이 생긴다. 찍으면서도 (영화가) 잘될 것 같았다."
"특히 영화 속에서 어릴 적 통통 튀던 창호가 성인이 되면서 돌부처가 되는데, 유아인 씨가 자기 캐릭터를 놓지 않으려고 그런 건지 진짜 과묵했다. '알고 있던 것과 대비되는 매력이 분명히 있구나. 실제 이야기처럼 나올 수 있겠다' 하는 예감이 들었다." -
Q. 극 중 조훈현은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고 다시 승부사 기질을 불태우는 인물이다. 이병헌 배우도 데뷔 초반 흥행 실패를 겪기도 하지 않았나. 업계에서 롱런하고 있는 조훈현 국수와 이병헌. 두 사람이 닮은 점도 있을까.
"저는 승부사 기질이 없어서 누굴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없다. 살면서 가장 승부욕이 불타올랐을 때는 고등학생 때 팔씨름에서였다. (웃음)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크게 작게 늘 실패하면서 사는 것 같다. 저도 사랑받은 작품이 많아서 실패가 없었다고 보실 수 있지만, 처음 영화 시작할 때 네 작품을 연거푸 말아 먹었다. 당시에 충무로에서는 '감독은 데뷔작만 망해도 안 쓰고, 배우는 세 번까지는 지켜본다'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배우는 세 번까지 지켜보고 안 되면 연기력과는 상관없이 '쟤 쓰면 망한다'고 했었다. 저는 정말 운이 좋게 네 번째 말아 먹고 다섯 번째에 '내 마음의 풍금' 캐스팅이 됐다. 4전 5기였다. 사람들이 저보고 '충무로의 미스터리'라고 했다."
Q. 정상에 있어 본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를 위협받게 되지 않나. 이병헌 배우에게도 조훈현 국수가 이창호에게 졌던 순간처럼, 그런 감정을 느꼈던 순간이 있나.
"바둑과 연기는 굉장히 다른 지점이 있다. 바둑은 그야말로 승과 패로만 갈리는 철저한 승부 세계다. 하지만 연기는 누군가가 뛰어난 연기를 해줘야 나도 함께 빛이 난다. 우리 일은 그런 점에서 (바둑과) 다르다."
"굳이 따져보자면, 연말 시상식에서 '내심 수상을 기대했는데 못 탔네' 하는 건 있을 수 있겠다. 극 중에서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지고 와서 허탈하게 담배를 피우며 망연자실한 모습을 연기하는 장면이 있다. 마침 그 신 찍기 전날 시상식이 있었는데 저랑 유아인 씨가 같은 부문에 노미네이트가 됐었다. 그때 유아인 씨가 상을 탔다. 감독님이 저에게 디렉션을 주시길래 '어제 같은 그런 감정인 거죠?' 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하긴 했다. (웃음)" -
Q. VIP 시사회에 이민정과 가족들이 함께 왔었는데 영화 본 후 반응이 어떻던가.
"저는 이 영화에 대해 객관성을 잃어서 몰랐는데, 이민정 씨도 그렇고 아들도 보면서 울었다고 하더라. '내가 그렇게 슬프게 연기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어디서 울었냐고 물어보니 창호에게 야단칠 때 울고, 창호가 집을 떠날 때 울었다더라. 다 저 때문에 운 게 아니었다. 아들은 제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게 '광해, 왕이 된 남자', 얼마 전 '공동경비구역 JSA' 재개봉했을 때, 그리고 '승부'가 세 번째다. (아들이) 자기가 순위를 매겨주겠다고 하면서 '승부'가 1등이라고 했다."
"장인어른께서 어제 집에 오셨다. 영화 재밌게 봤고 다른 건 몰라도 참 정성스럽게 만들었다고 하시더라. 워낙 바둑 팬이신 데다 그 시대를 겪은 분이라 당시 분위기를 미술적으로도 굉장히 잘 살렸다고 칭찬해 주셨다. 제 연기 칭찬은 안 해주시더라. (웃음)"
Q. 개봉을 앞두고 예비 관객들에게 관전 포인트를 짚어주자면.
"'승부'는 바둑 영화가 아니다. 심지어 감독님, 출연자 모두 바둑을 다 모른다. 바둑영화였다면 출연을 고민했을 거다. 이건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고, 사제지간의 드라마틱한 실화에 기본을 두고서 만든 거기 때문에 사람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로 봤다. 바둑 영화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다."
- 이우정 기자 lwjjane864@chosun.com
인기뉴스
Copyright ⓒ 디지틀조선일보&dizz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