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감소증은 병원에서 치료해야 할 질환일까, 아니면 일상에서 관리해야 할 변화일까?”
디지털 헬스는 고령화 사회의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기술이 작동하려면 제도, 신뢰, 수용성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선행돼야 한다. 근감소증에 대한 위 질문은 이 조건의 본질을 드러낸다.
디지틀조선일보는 ‘2025 한-노르딕 혁신의 날’ 보건 분야 세미나에 참여한 국내외 디지털 헬스 전문가 6인에게 고령화 대응의 공통 쟁점을 물었다. 디지털 헬스가 고령화의 실질적 해법이 되기 위한 조건을 조망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기술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가 어떤 문제를 중요하게 바라보는지 재정의하게 만드는 도구’라고 입을 모았다.
예컨대, 병원 방문이 어려운 고령자의 경우 ‘혈압이 높다’는 문제보다, ‘데이터가 없어서 대응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진짜 문제일 수 있다. 기술은 이런 숨겨진 맹점을 드러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더 정확히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가 어디에 주목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문제를 다르게 보면 기술도 달라진다
고령화는 단일한 문제가 아니다. 질병과 의료비, 돌봄 공백, 삶의 고립감까지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그렇다면 기술은 어디에 먼저 개입해야 할까?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 성창모 PM센터장은 “고령화에 따른 국가 시스템 위기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선 안 된다”며 “돌봄, 건강, 노후생활 등 주요 영역에 대해 국가가 리스크를 공동 분담해야 기술이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 생명과학클러스터 키르스텐 M. 다니엘센 선임 자문위원은 “기술이 사회적 역할을 하려면, 무엇을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지에 대한 ‘공동 비전’이 전제돼야 한다”며 “덴마크의 경우 국민 간 신뢰와 제도적 연대가 기술 실현의 기반이 된다”고 설명했다.
-
덴마크는 제도적 연대와 신뢰를 바탕으로 다양한 디지털 헬스 실증 사례를 운영하고 있다. 덴마크 보건부 발표에 따르면, 오르후스 대학병원의 ‘가정 투석 프로그램’은 입원 비용을 약 20% 절감했고, ‘TeleKOL(Key Opinion Leader Telemedicine)’ 시스템은 병원 밖 고위험군 환자의 재입원율을 20% 이상 낮췄다. 이는 단순히 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넘어, 환자와 의료진 간의 신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설계가 먼저 자리 잡았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하지만 한국은 병원 중심의 건강보험 수가 체계와 낮은 자가 보고 신뢰도, 개인정보 규제의 경직성 등으로 인해 이러한 모델을 바로 적용하기 어렵다. 성창모 PM센터장은 “멀티모달 데이터(영상, 음성, 생체신호 등 다양한 데이터) 기반의 실증 연구를 확장하고, 이를 제도 설계 단계부터 반영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규제과학센터, 글로벌 협력 플랫폼과의 연계가 ‘한국형 디지털 헬스 실증 모델’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실증 연구 기반 확충과 제도 정비를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최근 1차 의료 단계에서의 만성질환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수가 체계 개편을 검토 중이다. 디지털 헬스 실증 지원 사업도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규제과학센터는 실증과 인증을 연계할 수 있는 제도 개선 플랫폼으로 기능을 넓혀가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기술은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흐름을 잇는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헬스 기술이 ‘병원과 일상 사이의 단절’을 메우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카오헬스케어 황희 대표는 “기술이 다루는 문제는 질병이 아니라 데이터의 부재”라며 “병원 밖에서는 건강 데이터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기술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병원이 아닌 일상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개입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카카오헬스케어의 모바일 헬스케어 플랫폼 ‘PASTA(파스타, Personalized AI Self-care Total Assistant)’를 통해 사용자들은 건강 습관 개선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엔젤로보틱스 조남민 대표는 “근감소증 등 노화 관련 질환은 병원 치료보다 일상 속 반복적인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며 “웨어러블 로봇은 동작 패턴을 기록하고 피드백을 제공해 회복의 지속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데이터 부재와 일상 속 움직임의 단절은 결국 병원 밖 삶에 대한 기술의 관찰과 개입 능력으로 수렴된다. 고령화 사회에서 기술은 단순한 질병 진단을 넘어, 건강 위험을 조기에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는 수단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보다 정밀한 감지 기술이 필요하다.
덴마크 공과대학교 안야 보이센 교수는 더욱 정밀하게 문제를 감지하기 위한 기술의 진화를 설명하며 “알츠하이머나 감염 질환은 복합 바이오마커(혈액·유전자 등 다양한 생체 정보를 조합해 질병을 예측하는 지표)를 감지해야 하며, 우리는 이를 위해 뇌 속 특정 물질을 라벨 없이 감지하는 센서, 혈액-뇌 장벽을 통과하는 나노 소포체 등을 개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
그는 “항생제 복용 오류로 인한 부작용은 입원 환자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물 농도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라만 센서(Raman sensor, 빛의 산란 현상을 이용해 물질의 성분을 분석하는 기술)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성창모 PM센터장은 “기술은 단순히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정책 설계 단계부터 반영되어야 한다”며 “실제 생활에서 작동하는 기술이 되기 위해선, 국민의 행동 변화와 연결될 수 있는 실증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견해는 보이센 교수가 제시한 ‘정밀 감지 기술’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정교한 센서는 단순한 데이터 측정을 넘어, 행동 변화를 이끄는 디지털 헬스의 핵심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기술과 제도, 사람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면
기술이 현장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내려면,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동시에 사회적 신뢰도 함께 설계돼야 한다.
다니엘센 선임 자문위원은 “자가 보고 기반 홈케어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병원 이용 비용과 의료진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며 “이를 위해 서비스 설계부터 적용까지 더 많은 자금과 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이센 교수는 “센서나 나노기술은 민감한 개인정보와 연결된다”며 “기술 설계 초기부터 윤리 원칙을 반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용 맥락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희 대표는 “정부는 데이터 기반 헬스케어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데이터를 모두 확보하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며 “민간의 빠른 기술 발전 흐름을 정부가 조율하는 구조가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성창모 PM센터장은 “멀티모달 기술 기반의 연구개발이 늘고 있다”며 “규제과학센터나 글로벌 협력 플랫폼과 연계해 실증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은 문제를 다시 묻는 도구다
디지털 헬스는 질병 치료를 넘어,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고 우선순위를 재설정하는 과정에 기여해야 한다. 병원을 벗어난 공간에서의 정보 단절, 고령자의 자립을 위협하는 돌봄 체계, 제도와 신뢰의 부재 등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가 재정의되어야 기술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디지털 헬스는 복잡한 고령화 문제에 대한 단일 해법이 아니다. 각 영역의 과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연결하고, 지속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문제를 다시 묻는 것이다.
주한덴마크대사대리 필립 알렉산더 할크비스트는 “고령화 대응 기술은 단순히 고령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지 다시 설계하는 과정”이라며, 덴마크가 병원 밖,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실질적인 건강관리가 가능한 시스템을 기술과 함께 설계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술의 관점을 넘어, 이 기술을 실제로 사용하는 고령자와 돌봄 실무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간담회에서는 “기계를 착용하기 불편해하신다”, “현장에서는 사람의 눈과 손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아름다운재단의 보고서 역시 고령자의 기기 착용 거부감과 사용 어려움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는 기술 설계에 있어 수용성과 이해도를 고려한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기술이 사회 전반의 문제 정의에 기여하려면, 기술 외의 해법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 지역 방문 상담, 세대 간 교류, 공동 급식 같은 정서적·사회적 지원이 병행되어야 한다.
기술이 문제를 재정의하는 도구가 되려면, 그것이 제도로 연결되고 일상으로 확장되는 흐름 또한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병원 밖에서도 데이터를 수집·활용할 수 있는 기술 인프라, 제도적 설계 단계에서의 연계, 고령자에게 실질적으로 수용 가능한 기기와 사용 환경 조성, 그리고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협력 구조가 필요하다. 정부, 기업, 시민사회의 역할 분담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핵심 조건이다.
기술이 세상을 바꾸기 전에, 우리는 어떤 세상을 바꾸고 싶은지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 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