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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지식한 사람들이 좋은 것 같아요. 사람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고 하잖아요. 저는 정도를 걷고, 그 길을 지키고 싶어하고, 고지식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는 착한 사람들이 좋아요."
솔직히 처음 정주리 감독에 대해 관심이 깊어진 것은 배우 배두나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영화 '도희야'에 이어 영화 '다음 소희'로 재회했다. '도희야' 이후 '엄청 친하게 지냈나 보다'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했는데, 그것도 또 아니었다. 정주리 감독은 '도희야' 이후 두문불출했고, 배두나는 "이민 가셨나"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소희'라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정주리 감독에게 받았을 때는 '도희야' 이후, 7년이 흐른 후였다. 배두나는 읽고, 감독님을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겠다"고 했다. -
배두나와 감독들에 대한 인연을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2000)에서 함께했고, '괴물'(2006)에서 재회했으며, 그 사이 박찬욱 감독과 '복수는 나의 것'(2002)을, 그 이후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공기인형'(2010), '브로커'(2022)를 함께했다. 거장으로 꼽히는 감독이 사랑하는 배우, 배두나가 선택한 정주리 감독을 어떻게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앞서 말한 저 말도, 배두나가 사랑하는 감독의 연장선에 있는 정주리 감독에 대해 한 말이다.
'다음 소희'는 2017년 1월 전주에서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던 여고생이 3개월 만에 스스로 저수지에 몸을 던진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배두나 극 중 소희(김시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찾아가는 형사 유진 역을 맡았다. '도희야' 때도 형사 일남이었는데, '다음 소희'에서도 형사 캐릭터를 이어간다. 배두나는 "이 세계관으로 가실 거면, 일남이 아닌 영남은 어때요? 감독님께 농담하기도 했는데,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확고함이 있으세요"라며 두 작품에 대한 생각을 꺼냈다. -
"저도 사실 '도희야'의 영남이와 '다음 소희'의 유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정주리 감독님은 유진이 영남이보다 더 어둡고 지쳐있는 인물로 보이길 바라시더라고요. 더 처절하게 외로웠던 것 같아요. 세상에 엄마랑 자신, 둘만 있고, 엄마는 아프고, 10년을 병간호했고요. 경찰에 속해있지만, 사회생활을 잘한 스타일도 아니고요. 유진의 이야기들이 나오잖아요.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 한다고 더 무시당한다'는 유진의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고, 오래 생각해서 나온 말 일거예요. 영남보다 더 외로운 사람 같아요."
'다음 소희'는 쉽게 표현하면 2막 같은 구성의 영화다. 1막에서 현장실습에 나가게 되는 소희(김시은)의 이야기가 담기고, 2막에서 소희의 죽음을 따라가는 유진(배두나)의 이야기가 담긴다. 1막에서 유진은 소희와 잠깐 스치는 인연을 맺고, 2막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한 작품에서 중간 지점이 흐른 후에 등장하는 것, 분명 부담감도 있었다.
"일단 관객들이 다 알고 있잖아요. 소희의 마지막까지 봤고요. 유진이 하는 이야기는 '소희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파헤치는 내용이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어요. 그래도 감독님께서 '배두나라면 할 수 있다'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저는 '감독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가 뭘까'라고 생각했는데, 관객들이 제가 나오는 지점부터 감정적으로 따라가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 부분을 좀 더 중점적으로 한 것 같아요. 날 것 그대로, 내가 느낀 그대로를 호흡하면서요. 더 오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참지도 않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기적으로는 부담스러웠지만, 구조적으로는 참신하고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희와 유진이 끊어지지 않는 이야기 같아서요." -
'다음 소희'는 개봉 전, 칸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무려 '폐막작'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판타지아국제영화제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의 영예까지 안으며 호평을 이끌어냈다. 배두나에게는 촉이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 어깨를 으쓱이며 답변을 이어갔다.
"너무 뿌듯했어요. 신기해요. 제가 현장에서 (김)시은이 연기를 모니터로 보는데요. '이 영화 너무 좋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감독님께 빨리 편집해서 영화제에 내보자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전 세계 영화제에서 너무 좋은 평을 받으니까 '감독님, 얼마나 좋은 영화를 만든 거야?'라면서 설레고, 떨리고, 내 자식이 나가서 칭찬받고 있는 것 같아서 되게 좋았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개봉하는 시점이 가장 떨려요. 어떻게 보실까. 식은땀이 나요. 개인적으로는 아주 뿌듯하고, 자랑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
유독 '다음 소희'에 배두나가 이렇게 애정을 가진 이유가 있을까.
"보통 배우들은 프리 프로덕션이나 포스트 프로덕션을 하지 않고, 촬영만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정주리 감독님과 '다음 소희'의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처럼 동지처럼 곁에 있었어요. 사실 이런 작품이 상업영화계에서 투자가 엄청 잘된다거나, 5~600명의 관객이 들 정도로 기대작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아요. 그런 걸 옆에서 봐왔고, 그런데도 그 꺾이지 않는 마음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이런 게 멋있어요. 타협하지 않아요. 그 모습을 옆에서 봤고요. '도희야' 때보다 리더로서 마음도 강해지셨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멋있게 바뀌셨지?'라고 생각했어요."
"정주리 감독님은 크리에이터로서는 고집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날카롭고,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고요. 일단 영화를 너무 잘 만들어요. 아주 솔직한 마음은 제가 정말 그분의 영화를 엄청 좋아합니다." -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끼리끼리'라고 했던가. 그 사람과 친한 사람을 보면, 더욱 투명하게 그 사람이 보이기도 한다. 정주리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배두나의 모습 속에도 고집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배두나는 "저는 그분들보다는 좀 타협합니다. 불의를 봐도 어떨 때는 참아요"라고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촬영이 우선이다'라는 마음은 고지식한거죠.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저만의 고지식함이 있어요. 영광보다는 촬영이 우선. '다음 소희'와 '브로커'가 동시에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는데도 갈 수 없었던 이유도 그렇고요. 제가 고용을 당한 순간에는 제 시간이 제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 촬영장에 대한 자세도 제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낭만적으로 생각하곤 해요. 양심의 가책이 되는 일은 잘 안 하려고 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
그런 배두나는 '다음 소희'로 만난 인터뷰에서 딱 한 번 눈물을 글썽였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소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였다.
"사실 '다음 소희'라는 제목 자체가 저는 씁쓸합니다. '다음 소희'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지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음 소희'를 찍으며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요. 우리의 소희 양과 같은 처지에 있거나, 같은 걸 느끼는 분들, 그렇지만 같은 선택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거잖아요. 그분들에게 고맙더라고요. 버텨준 것에 대해, 버티고 있는 것에 대해서요. 저는 이 영화가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바람직한 어른'에 대한 고민도 이어가고 있다. '인간'은 배두나가 고찰하고 있는 화두다.
"저는 소희들의 시간을 지나왔잖아요. 저도 청소년, 20대일 때 막연하게 몰아붙여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럴 필요가 없고, 행복하기만 해도 되는 나이인데 왜 그랬을까 싶어요. '나는 좋은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생각보다,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덜 아팠으면 좋겠어요. 우리 때보다는 나아지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이 있어서 아이들의 이야기에 참여하려고 하고요. 그런 쪽으로 무언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