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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리포트] 걷는다는 것의 의미: 고령사회의 자립을 지키는 힘

기사입력 2025.04.23 06:00
  • 우리는 흔히 노인의 움직임이 줄어드는 이유를 단순히 신체적 노쇠로 설명한다. 물론 관절, 근육, 균형감각의 변화는 중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과연 노인은 왜 덜 움직이게 되는 걸까?

    과거 농경사회에서도 노인은 대체로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체 속에 연결된 존재였다. 마을 어귀의 정자에 나와 아침을 맞고, 이웃과 안부를 나누며, 손자 손녀를 품에 안았다. 그들은 중심에 있었고, 사회와 이어져 있었다. ‘움직이지 않음’은 존중이었고, 쉼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현대 도시는 다르다. 노인은 고층 아파트에 머물고, 엘리베이터와 지하철, 복잡한 도심은 그들을 점점 밀어낸다. 은퇴 이후의 삶은 구조적으로 ‘쉴 공간’만을 제공할 뿐, ‘움직일 이유’는 사라진다. 어르신에게 “조심하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사회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이지 마세요’를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고령자의 사회적 역할과 고립에 대한 연구(2021)’에 따르면, 산업사회 이후 생산성이 중심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노인은 점차 사회적 역할을 상실하고, 고립과 소외의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노인의 사회활동 참여를 제한하고, 이동성 저하로 이어지는 구조적 배경이 된다. 도시 설계 또한 고령자의 이동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지하철 환승 통로나 고층 주거 환경은 오히려 노인의 외출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현실은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단지 불편함이 아니라, 존엄의 중단일 수 있다. /사진 출처=픽사베이
    ▲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단지 불편함이 아니라, 존엄의 중단일 수 있다. /사진 출처=픽사베이

    보건복지부의 ‘노인의 낙상 예방 및 관리 지침(2021)’에 따르면, 고관절 골절을 겪은 고령자의 약 20~30%가 1년 내 사망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걷지 못하는 순간, 불편을 넘어 돌봄이 시작되고, 자립은 멈춘다. 이동을 돕는 다양한 기기가 개발되고 있지만, 기술만으로는 해답이 될 수 없다. 자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지 이동 능력의 회복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맺고 사회적 연결을 되찾는 일이 필요하다. 기술은 자립을 돕는 파트너일 수는 있어도, 연결을 대신할 수는 없다.

    숭실사이버대학교 이호선 교수는 유튜브 강연을 통해 “갈 곳이 없어도 매일 외출하라”고 조언했다. 외출은 고립을 막고, 사회와 연결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그는 움직이지 않으면, 삶의 반경은 방 한 칸으로 좁아진다고 강조한다.

    일본 후지오카시의 사례는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 지역에서는 ‘오니이시 모델’이라 불리는 고령자 대상 근력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참여자들은 단지 낙상 예방만이 아니라, 자세 개선, 통증 감소, 계단 이용의 수월함, 이웃과의 교류 확대 등 삶의 여러 영역에서 긍정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만에서도 유사한 프로그램이 실시된 바 있다. 2024년 발표된 대만 치아이현에서 시행된 지역사회 기반 맞춤형 기능 훈련(Precision Functional Training, PFT) 프로그램 연구에 따르면, 지역사회 거주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낙상 예방 운동 프로그램은 1개월 후 보행 속도, 보행 주기, 인지 기능 등에서 유의미한 개선 효과를 보였다. 비록 1년 후에는 효과가 유지되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단기간 집중 운동이 고령자의 이동성과 심리적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자립은 걸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된다. /사진 출처=픽사베이
    ▲ 자립은 걸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된다. /사진 출처=픽사베이

    운동을 통한 자립력 회복은 건강을 넘어, 지역 공동체와의 연결까지 확장된다. 기술과 복지가 만나는 지점도 필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고령자가 ‘움직이도록, 움직일 수 있도록’ 사회가 함께 나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걷고 싶은 길, 머물 수 있는 공간, 쉽게 탈 수 있는 교통이 갖춰진 도시 인프라가 필요하다. 더불어 동네 복지관 중심의 걷기 모임이나 병원과 시장, 복지시설을 연결하는 동행 지원 제도 같은 생활 밀착형 실천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 

    이동권은 고령자의 권리이자, 사회의 책임이다. 고령사회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삶의 지속 가능성이다. 사회는 이제 물어야 한다. “노인은 왜 움직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노인이 움직이기 어렵게 만들었는가?”라고.

    걷는다는 건 관계를 여는 시작이자, 삶의 존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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