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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연구, 왜 우주로 갔을까… ‘문제 해결형 R&D’ 실험이 시작됐다

기사입력 2025.05.23 06:00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 성창모 PM센터장 인터뷰
  • “기술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먼저 정하는 것. 실패를 허용하는 구조에서 혁신은 시작됩니다.”

    급속한 고령화가 초래한 사회적 과제를 앞두고,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지난 5월 14일, 주한덴마크대사관이 주최한 ‘2025 한-노르딕 혁신의 날’ 보건 분야 세미나에는 국내외 보건·의료 전문가가 참석해 고령화 문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했다. 그 현장에서 만난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하 추진단)의 성창모 PM센터장은 기존의 기술 중심 연구개발(R&D) 방식을 넘어서는 ‘문제 해결형 R&D’라는 새로운 접근을 설명했다.

  •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 성창모 PM센터장이 ‘2025 한-노르딕 혁신의 날’ 세미나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사진 제공=주한덴마크대사관
    ▲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 성창모 PM센터장이 ‘2025 한-노르딕 혁신의 날’ 세미나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사진 제공=주한덴마크대사관

    정부 주도 고령화 대응 전략의 설계자이자, 기업·학계·글로벌 협력을 잇는 정책 교차점으로 주목받는 추진단은 이제 R&D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실험에 나서고 있다. 전환의 배경과 방향에 대해 성창모 PM센터장에게 직접 들어봤다.

    고령화 대응, 기술보다 ‘문제’에서 출발

    추진단은 기존의 기술 중심 지원 방식이 아닌,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난제를 중심으로 과제를 기획한다. 먼저 문제를 정의하고, 그에 적합한 기술과 연구진을 구성해 접근하는 방식이다.

    “기술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하고, 그 문제에 맞는 기술을 가져와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문제 해결형 R&D’입니다. 이 구조에서는 처음부터 정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기술이 적합한지도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죠.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풀고 싶은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미국의 ARPA-H 모델을 벤치마킹한 ‘미션형 R&D’ 구조로 설계되었으며, ‘미션-프로젝트-과제’의 단계별 체계와 Go/No-Go 방식의 중간 평가를 통해 유연성과 집중도를 동시에 확보한다.

    2024년부터 추진 중인 고령화 대응 미션은 ‘근감소증 치료 모델’이 대표적이다. 이 과제에는 약 180억 원이 투입되었으며, 약물·운동·디지털 치료제를 결합한 멀티모달 방식으로 근육 기능 저하율을 40%에서 10% 미만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단백질 보충제나 약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병원에서 한두 번 운동 지도해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디지털 치료제나 웨어러블 같은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재활, 약물, 생활 습관 교정이 동시에 맞물려 돌아가야 합니다.”

    이는 단일 기술이 아닌 복합적인 건강관리 전략이 필요한 영역으로, 향후 실제 의료 현장의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우주로 향한 시선, 문제 정의의 방식부터 바꾼다

    성창모 PM센터장이 말하는 ‘문제 해결형 R&D’는 단지 기술을 개발하는 방식의 전환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시선의 전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우주의학’을 언급했다. 무중력 상태인 우주는 지구보다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특성이 있어, 이를 활용한 연구가 고령화 대응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우주에서는 노화가 압축돼서 일어납니다. 짧은 시간 안에 근 감소, 인지기능 저하 같은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거든요. 그 환경을 실험실처럼 활용해서 노화 관련 바이오마커를 찾아내는 게 목표입니다. 젊은 연구자들과 기업들이 여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 PM센터장은 ‘우주의학’이 추진단의 실제 과제는 아니지만, ‘우주’라는 극한 환경을 문제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 사고방식은 단순 기술 개발이 아니라 문제 정의의 틀부터 바꾸겠다는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추진단이 실제 과제로 추진 중인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추진단은 치매와 노쇠에 대응하기 위한 인공지능(AI) 기반 ‘바이오 파운데이션 모델’을 새로운 과제로 출범시킬 계획이다. 지난 5월 14일 열린 제안자의 날에서 해당 모델에 대한 전문가 토론이 진행됐으며, 오는 7월 정식 과제로 착수할 예정이다. 이는 기존의 질병 치료 중심 접근에서 벗어나, 예측·예방 중심의 디지털 헬스 시스템으로 전환하려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 ‘2025 한-노르딕 혁신의 날’ 세미나에서 정책 비전을 발표 중인 성창모 PM센터장. ‘문제 해결형 R&D’의 방향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주한덴마크대사관
    ▲ ‘2025 한-노르딕 혁신의 날’ 세미나에서 정책 비전을 발표 중인 성창모 PM센터장. ‘문제 해결형 R&D’의 방향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주한덴마크대사관

    기술 이전이 아닌 ‘연구 문화 수입’을 위한 글로벌 협력

    추진단은 기술만으로는 혁신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글로벌 협력의 목표도 기술 교류보다 연구 방식과 문화의 전환에 있다.

    “한국은 AI나 퀀텀 같은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췄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술만 가지고 오려고 하지 말고, 그 기술을 만든 나라들이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방식으로 실패를 다루는지부터 배워야 합니다. 협력은 태도와 문화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 미국의 ARPA-H, 일본의 문샷, 독일의 스프린트 등과의 공동 연구뿐 아니라, 한-노르딕 간 공동 펀드 조성, 규제 샌드박스 운영, 오픈이노베이션 플랫폼 구축 등을 구체적으로 추진 중이다.

    이러한 글로벌 연계 전략은 고위험 전임상 연구의 재정적 공백을 메우고, 디지털 바이오마커와 같은 신기술의 평가 환경을 실증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또한 인력 교류 및 공동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연구자가 다양한 문제 정의와 실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상용화의 관건은 ‘규제와 구조’

    고령화 기술이 현장에 안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보다도 제도적 기반이다. 근감소증 치료처럼 다양한 기술이 융합된 멀티모달 접근은 기존 규제 체계 안에서 적절히 평가되기 어렵다.

    “처음부터 규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기술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제품이 나왔을 때 ‘이건 의료기기로도, 건강기능식품으로도 애매하다’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면, 연구 시작부터 규제와 손잡아야 합니다.”

    이에 따라 추진단은 한국규제과학센터와 MOU를 체결하고, 연구 초기 단계부터 식약처와 협력해 가이드라인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규제 대응을 시도하고 있다.

    이 외에도 데이터 정확도, 보안, 개인정보 보호, 디지털 격차, 건강보험 연계 등의 요소가 상용화 과정에서 주요 장애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추진단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개발뿐 아니라 지원 체계, 정책 설계, 제도 연계를 함께 고민하는 다층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정책 실험의 최전선에서

    추진단은 이제 막 사업 2년 차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직은 단순한 R&D 집행기관이 아니라, ‘어떻게 기술을 정의하고,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설계할 것인가’ 자체를 실험하는 정책 실험실이다.

    “연구자에게 문제를 직접 정의하게 하고, 그에 맞는 자원을 연결해 주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기존 시스템이 외면하던 문제를 발굴하고, 연구자들이 실패를 감수하면서 실험해 볼 수 있게 판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그 판을 짜는 중입니다.”

    고령화 사회를 위한 기술은 단지 노인을 위한 복지 수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준비해야 할 미래 전략이기도 하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 이끄는 이 실험은 단지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는지, 그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다룰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정책적 접근 방식의 시험대다. 고령화 사회를 준비하는 R&D가 연구실을 넘어 구조와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임을 보여준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문제 해결형 R&D’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반응이 오갔다. 디지틀조선일보는 세미나에 참석한 주요 연사들에게 고령화 대응의 핵심 쟁점 3가지에 대한 공통 질문을 던졌다. 정책 설계자의 비전이 현장 전문가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다음 기사에서는 그들의 시각을 통해, ‘문제를 바꾸는 기술’이 현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