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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26세의 어린 나이로 영국의 군주이자 영연방의 수장으로 집권한 지 약 70년 만이다.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일주일이 넘도록 추모 분위기에 휩싸인 가운데, 이 일을 계기로 영국 연방 곳곳에서 군주제 폐지에 대한 주장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군주제 체제 자체가 현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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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비와의 이혼과 잇따른 불륜 스캔들 등 그간 논란이 끊이질 않던 찰스 3세가 새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군주제 폐지에 대한 주장에 더 큰 힘이 실렸다. 즉위식 당시 만년필을 치우라고 손짓하며 짜증을 내는 모습이 생중계되며 전 세계적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국이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뀌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영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영국 왕실의 '상징성' 때문이다. 영국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상징적 존재다.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시 영국의 '정신적 지주'로 불려왔다.
이처럼 현재까지 왕실이 남아있는 국가 대부분은 전통적인 의미보다 상징적인 의미로서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세습' 형태의 권력을 존속시키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부계혈통' 고집하는 일본 왕실, 계속되는 왕족 감소에 "대(代) 끊길라"지난해 나루히토 일왕의 조카 마코 공주가 결혼하며 왕족 신분을 잃었다. 일본은 여성 왕족이 일반인과 결혼하면 왕적에서 제외되며 일반인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 마코 공주는 결혼 직후 일본을 떠나 미국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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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다시 한번 일본 왕실의 영속성 문제가 불거졌다. 왕족의 수가 감소하며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남성 왕족이 절대적으로 적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왕족 중 유일한 남성은 후미히토 왕세제의 아들인 히사히토 왕자 뿐이다.
일본 정부는 공주 또는 모계혈통 남성도 왕족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여성 궁가' 창설을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논의해온 바 있다. 그러나 "125대 부계로 이어온 전통을 무너뜨릴 수 없다"라는 보수파의 반대 의견으로 현재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군주제 개혁' 외치는 태국 청년들... 세대 간 갈등 원인 되기도태국은 1932년 절대왕정이 종식되고 입헌군주제로 전환됐다. 그러나 여전히 왕실은 신성시되고 있으며, 그 권력은 막강하다. 형법 112조에 따르면 왕실 구성원과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거나 부정적인 묘사를 하는 경우, 최장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근 태국에서 왕비를 연상케 하는 전통 의상을 입고 시위에 참여한 활동가가 왕실모독죄로 징역형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태국 인권변호사 단체는 현지 언론을 통해 지난 2년 동안 군주제 개혁을 외친 활동가 중 최소 210명이 왕실모독 혐의를 적용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태국 내에서 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거세다. 2020년부터 왕실의 예산 축소와 왕실모독죄 폐지 등의 내용이 담긴 군주제 개혁 요구 시위가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하면서, SNS를 활용한 게릴라식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현지 언론에서는 국왕을 신성시하는 것이 당연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부모 세대와의 갈등과 분열이 격화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정착시킨 스페인 카를로스 전 국왕, 잇따른 왕실 스캔들에 '불명예 퇴위'1975년 즉위했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에 민주주의를 선물한 국왕으로 평가받는다. 즉위 후 스스로 전제군주권을 버리고 입헌군주제를 택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스페인 왕실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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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제위기가 시작되고 왕실의 사치와 부패 행태들이 밝혀지며 국민들은 등을 돌렸다. 카를로스 국왕의 막내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는 600만 유로(약 90억 원)의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카를로스 1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아프리카에 호화 코끼리 사냥을 하러 간 사실이 알려지며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던 국민들의 격분을 샀다.
결국 카를로스 1세는 즉위 29년 만에 자진해서 퇴위를 선언했다. 이에 스페인 곳곳에서는 군주제 폐지와 국민 투표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는 아들인 펠리페 6세가 즉위해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 송정현 기자 hyun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