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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무용을 배웠다. 이한별이 어린 시절 학교에 제출한 장래희망에는 '안무가'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 후, 미술을 뒤늦게 시작하게 됐다. 어렸을 때 '배우, 연예인'이라는 단어는 멀게만 느껴졌다. 대학교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작업물을 만들고 싶다'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산업의 성격이 강한 디자인은 '나'보다 '돈'을 필요로 했다. 고민이 깊어졌다. 책과 영화, 그리고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선 배우는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 사람처럼 뭔가 해볼 수 있을까'라는 마음에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연기를 배웠다. 단편 영화를 만드는 수업도 들었다. 실제로 단편영화 연출을 해보기도 했고, 다른 사람의 단편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하기도 했다. 즐거웠다. '무언가를 만든다'라는 마음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생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그 마음은 이한별을 움직이게 했다. 연기는 이한별이 "행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내가 힘든 이유가 '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자"라고 재차 되뇌었다. 연기로 인해 부유하지 못한 것이 아닌, 행복하기 위해 스스로 연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
- ▲ 영상 : 허준영 영상기자,popkorns@chosun.com
그리고 '마스크걸'을 만나게 됐다. '마스크걸'의 주인공 김모미는 남다른 끼를 타고났다. 어린 시절에는 그 끼로 박수를 받았지만, 성장하며 사람들은 외면했다. 그렇게 생긴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무대 위에 서고 싶었던 김모미의 꿈은 좌절됐다. 그런 김모미를 보며 이한별은 "제가 연기를 준비하며 느낀 것과 비슷한 지점"을 발견했다.
마음이 열렸다. '마스크걸'을 연출한 김용훈 감독은 "너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했다. 캐스팅이 확정되기까지 약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팬데믹 상황에서 이한별은 미팅에 앞서 다양한 독백 영상을 김용훈 감독과 '마스크걸' 제작진에게 보냈다. '이런 느낌이 필요하다'라는 피드백을 들으면, 다시 영상을 찍어서 보냈다. 마땅한 대사가 없을 때는 스스로 쓴 글을 대사처럼 읽어서 보내기도 했다. -
"처음 대면 오디션을 봤을 때에는 스태프들과 만났고, 그 다음 오디션에서 처음 김용훈 감독님을 뵈었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마스크걸'의 전체 시나리오를 볼 수 없었죠. 몇 장면 발췌된 오디션용 시나리오를 보고 연기를 했고요. 다른 독백도 하고, 춤도 살짝 보여드린 것 같아요. 그 외에는 저에 대해 많이 물어보셨어요.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취미생활이 있는지, 다양한 질문을 해주셨어요. 지금 들은 바로는 그런 대화 속에서 저와 모미가 닮은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최종적으로 소식을 들은 건 4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운동도 시작했고, 의상 테스트도 해본 시점이었어요. '이러다가 안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확정 소식에도 들뜨기보다 준비해야 할 것들을 떠올린 것 같아요. '정말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요."
단편 영화 등으로 촬영 현장에 처음 가본 것은 아니지만, 시리즈 작업 현장은 확실히 달랐다. 이한별은 "단편영화를 할 땐, 그때만의 부족하고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내는 재미도 있었는데, 여기는 캐릭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에서 제 해석을 더해 '김모미'로 완성되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현장에서 바뀔 수 있고, 즉흥적으로 영감이 떠오를 수 있고. 이런 게 굉장히 훌륭한 곳이 아닐까 싶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곳에서 이한별은 '김모미'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때마다 많이 걸었다. 신인배우로 현장에 조심스러웠던 이유이기도 하고, 촬영 외에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졌던 이유도 있었다. -
"핸썸스님과 모텔에 가기 전 상황이었어요. 그 전까지는 모미가 물론 일반적인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직장 상사나 동료와의 일이 주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핸썸스님과 만난 후부터 모미의 인생이 나락으로 빠지고, 사건이 휘몰아친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께서도 이 부분을 이전과는 다른 텐션으로 만들어보고 싶어하셨던 것 같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로 이 상황을 그려갈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것 같아요."
이한별은 첫 번째 모미가 해야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첫 번째 모미에 감정이입됐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났다. 자신의 생각이 관객에게 닿은 것 같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큰 사건이 휘몰아치기 때문에, 초반 김모미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싶었다.
"감독님도 그런 이유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고, 해보자는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3인 1역이라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큰 것 같아요. 정말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첫 번째 모미의 잔상이 보여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
김모미는 시간 순으로 이한별, 나나, 고현정이 만들어간다. 이한별이 처음 마스크를 쓰고 'BJ 마스크걸'로 활약하는 김모미를 그렸다면, 나나는 성형수술 한 이후의 김모미를 담아냈고, 고현정은 약 1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김모미를 맡아 대미를 장식했다. 한 사람을 연기했지만 각기 다른 시점을 선보였다. 촬영 현장에서 세 사람이 함께 모이지는 못했다. 심지어 '마스크걸' 뒷풀이 장소에서도 나나가 영화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세 사람이 다함께 모인 것은 '마스크걸' 제작발표회였다. 당시 처음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이한별을 위해 나나는 손을 잡아주었고, 고현정은 중간 자리를 양보했다. 훈훈한 세 명의 김모미였다.
"서로 신기한 것도 있었어요. 같은 역할인데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이제서야 만나다니 '무슨 작품을 한 걸까' 이런 이야기도 하며 웃었어요. 저도 남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같은 역할이고, 제 미래들이잖아요. 제가 제작발표회가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했거든요. 사진 찍을 때 많이 긴장됐는데, 그 시간을 마치고 같이 걸어서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데 '어벤져스' 처럼 느껴졌어요. 처음 고현정 선배님을 뵈었을 때 저를 안아주셨거든요. 이 캐릭터를 애정해주신다는 생각에 굉장히 따뜻하고, 감사하고, 마음이 편해졌어요. 나나 선배님과는 춤 연습하면서 뵈었는데 그때부터 쭉 격려와 응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덕분에 제작발표회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대중에게 처음 '배우 이한별'을 선보이는 작품을 마무리했다. 아직 롤모델로 꼽는 분은 없지만, '마스크걸' 현장에서 만난 안재홍, 염혜란을 비롯해 고현정, 나나 등 모두가 그의 롤모델이 되었다.
"아직 제가 해보지 못한게 많아서요. 다양하게 해보고 싶은데요. 저라는 사람이 잘 투영될 수 있는 일상적인 캐릭터들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마스크걸' 후반부처럼 장르적인 색이 짙은 캐릭터도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다양하게 해보고 싶습니다."
마스크를 벗은 이한별은 이제 시작이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
- 허준영 영상기자 popkorn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