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의료 AI’ 기술, 中에 추월당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조사 결과 발표… 1위국 미국과 2.7년 격차
“의료 데이터 확보, 수가 조정 등 정부 지원 통한 대응책 강화해야”
지난해 한국 의료 인공지능(AI) 기술 점수가 세계 4위 수준으로 집계됐다. 6년 전 통계와 같은 순위지만 주변 순위가 바뀌었다. 기존 3위였던 일본은 5위로 내려갔고, 5위였던 중국은 한국과 일본을 앞질러 3위를 기록했다. AI 분야 선진국으로 치고 나서는 중국에게 한국과 일본이 추월당한 것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지난 9일 한국 의료 AI 기술 점수가 평균 74점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이는 최고기술 보유국(미국)의 기술 수준을 100점 만점으로 두고 상대적 기술 수준을 평가한 점수다. 현재 우리가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평균 2.7년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진흥원은 보건의료·산업 분야에서 주요 핵심기술에 대한 수준 진단과 해당 기술수준 향상을 위한 시책 마련을 위해 한국, 중국, 일본, 유럽, 미국 등 주요 5개국을 대상으로 상대적 기술 수준과 격차를 평가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의료 AI는 △질병 진단·치료 시스템 △질병 예방·예측 시스템 △신약개발 알고리즘 △의료자원 최적화 시스템 등 4개 분야로 나눠 조사했다.
◇의료 AI 핵심 ‘질병 진단’ 기술 놓고 경쟁 심화
의료 AI는 진료기록이나 의료기기로부터 측정된 생체 측정 정보와 의료영상, 유전정보 등 다양한 의료 데이터를 순환신경망(RNN), 합성곱 신경망(CNN), 강화학습, 심층학습, 적대적 신경망(GAN) 등을 통해 학습해 질병을 진단, 예측, 치료하고 신약을 개발하는 기술을 뜻한다. 많은 양의 의료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의사를 도와 환자의 질병을 진단, 예측하고 필요한 약을 개발한다고 보면 된다.
이번 조사에서 의료 AI 분야 최고기술 보유국은 미국이었다. 4개 분야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의료자원 최적화 시스템 분야에서만 3위를 기록했고 나머지 부문은 모두 4위였다.
아쉬운 부문은 ‘AI 기반 질병 진단·치료 시스템’이다. 현재 국내에 있는 다수 의료 AI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기술 개발과 공급에 뛰어들면서 높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75점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했다. 미국(100점), 중국(88.5점) 유럽(83.5점)과 비교해 격차가 큰 점수다. 1위 미국과 비교해 기술력이 2.9년 뒤처진 것으로 파악됐다.
AI 기반 질병 진단·치료 시스템은 말 그대로 AI로 환자의 질병을 진단·분석해 결과를 내리고 치료하는 기술을 뜻한다. 환자의 CT, MRI, 엑스레이 영상 등을 AI로 판독해 이상 여부를 찾아내는 AI 기반 영상판독 시스템이 대표 사례다. 현재 국내에서는 뷰노, 루닛, 딥노이드, 코어라인소프트 등 의료 AI 기업들이 해당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뇌, 척추, 폐, 관절 등을 촬영한 의료영상을 AI로 분석해 암, 골절 등을 진단하는 기술을 개발해 군과 병원에 공급 중이다. 루닛은 지난달 27일 바이오헬스 신시장 창출 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유방암 진단을 돕는 AI 판독 기술을 시연하기도 했다. 카카오의 자회사 카카오브레인도 이 기술을 응용해 환자의 흉부 엑스레이 영상을 보고 판독문을 생성할 수 있는 AI 기술을 개발할 계획을 밝혔다.
◇“AI 만들 데이터와 공급할 시장 마련 필요”
이처럼 AI 기반 진단·치료 시스템 개발은 다방면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선행 국가와의 기술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위원회는 그 이유로 △의료데이터 부족 △기술 수요 부족 △비즈니스 활용 부족 등을 꼽았다. AI는 기술 정확도와 고도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데이터가 필요한데 이를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인 문제가 많고, 이러한 한계를 뚫고 기술을 개발했더라도 수익 창출이 어려워 추가적인 기술 고도화가 어렵다는 설명이다. 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AI 기술 고도화를 위해서는 많은 양의 데이터를 활용해 충분한 학습을 해야 하지만 질병의 종류 또는 진단·치료 방식 등에 따라 관련 데이터를 충분히 얻기 어려워 임상적 유효성 확보와 상용화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부분이 있다”며 “병원 등 민간 데이터와 공공 데이터의 원활하고 활발한 연계를 통해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비즈니스 한계 문제는 기술에 대한 이해 상승과 수가제도 조정 등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의료 AI 산업은 타 산업군에 비해 참고 모델이나 자료 등이 부족해 AI를 기반으로 한 질병 진단 시스템 도입을 적극적으로 희망하는 병원이 적고, 이 때문에 AI 기반 시스템을 개발해도 활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도 적어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중 하나가 수가제도 조정이다. 위원회는 “정부가 관리하는 수가제도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해도 기존 시스템에 준하는 수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 때문에 새로운 시스템을 활용하려는 시장이 매우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의료 AI 기업인 딥노이드의 최우식 대표는 “새로운 의료기술에 수반된 의료기기의 경우 식약처로부터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받아 식약처 허가를 획득하면 의료기관에 판매가 가능하지만 AI 의료기기의 경우 식약처 허가 단계에서 ‘건강보험 코드’가 부여되지 않아 의료기관에서 신기술 의료기기를 써도 환자에게 진료비를 청구할 수 없다”며 “의료기관은 직접 이용료를 내야 하는 만큼 신기술 의료기기 도입을 꺼리게 돼 이런 의료기관을 상대로 제품을 파는 AI 의료기기 업체도 유의미한 매출을 내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의료 규제 완화와 급여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지원과 동시에 기업의 차별된 기술 경쟁력 요구
규제 완화와 같은 정부 지원 강화는 AI 기반 질병 예측·예방, 신약개발 알고리즘, 의료자원 최적화 시스템 등 다른 분야에서도 최우선 사항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위원회가 약 1만 8000명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기술 향상을 위해 필요한 방안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기술 수준 향상을 위해 필요한 요인으로 정부 지원 정책을 1위로 꼽았다. 각 분야에서 정부지원 정책을 필요 요인으로 꼽은 비중은 AI 기반 질병 예방·예측 시스템이 33.3%, 신약개발 알고리즘 28.6%, 의료자원 최적화 시스템이 27.3%였다.
위원회는 “개인이 동의한 건강·의료정보 활용이 가능하도록 의료계와 산업계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부정·불법적인 사용에 대한 관리와 규제를 엄격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의료계와 산업계의 데이터 연계가 가능하도록 법적·정책적 제도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정부의 연구개발비 투자도 확대해야 하지만 성공과 실패의 성과 관리를 엄격하게 해 성과 중심의 연구비 투자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 투자 외에 각 기업이 차별된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의료 AI 기업에 종사하는 관계자는 “현재 의료 분야에서 AI가 많이 사용되는 분야는 신약개발과 영상판독 시스템 정도”라며 “일부 스타트업이 만든 기술을 다른 스타트업이나 대기업이 모방하는 형태로 사업이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실질적인 의료 AI 경쟁력을 위해선 국내에서의 집안 다툼이 아닌 해외와의 경쟁을 위해 자체 기술력을 고도화하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