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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진 지 몇 십 년은 지난 듯한 빌딩들이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다. 페인트가 벗겨진 벽은 분홍색, 하늘색, 잿빛 조각보로 만든 누비이불처럼 보인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낮추면 시장이 보인다. 과일, 꽃, 장난감, mp3 플레이어, 딤섬 찜통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모아놓은 것 같다.
홍콩의 구룡반도의 안쪽, 몽콕과 야우마떼이의 골목들은 시장에서 출발해 시장으로 끝난다. 골목의 개수들만큼 다채로운 물건과 사람들, 이야기가 발길을 기다린다. 물론 그곳에는 현지인들에게 사랑 받는 ‘진짜 맛집’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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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통할 가능성이나 친절한 접객은 좀처럼 기대하긴 어렵지만, 이곳 식당들의 저렴한 가격과 놀라운 맛은 그 정도 불만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었던 홍콩의 원초적 미각이 기다린다.
차오쳉유엔(Chao Cheng Yuan) - 단돈 3000원에 즐기는 홍콩의 소울푸드 -
홍콩 사람들에겐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기질이 있다.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허세에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만큼 홍콩 서민들에게 사랑 받는 식당들은 대체로 놀랍도록 맛있고 믿기 어려울 만큼 싸다.
차오쳉유엔은 그런 ‘홍콩 맛집’의 전형이다. 몽콕을 대표하는 번화가 퉁초이 스트리트(Tung Choi Street)의 어지러운 중국어 간판들 사이, 차오쳉유엔을 단번에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길 위의 여정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홍콩식 죽 콘지부터 솥밥, 간단한 딤섬까지 이곳의 메뉴는 40여 가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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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광둥식 국수다. 큼직한 족발, 하늘하늘한 완탕, 탱글한 피시볼,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는 소 힘줄 등 다양한 토핑 중 하나를 정하는 일은 상당한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
마침내 푸짐한 국수 한 그릇이 식탁 위에 놓인다.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지만, 면발을 입에 넣기 전 치러야 하는 의식이 하나 더 있다. 테이블 위 홍식초를 살짝 뿌려줄 것. 부드러운 풍미의 붉은 색 식초가 국물에 스미자, 낯선 향신료와 육중한 기름기가 조화로운 풍미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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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쳉유엔의 훌륭함은 음식 맛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곳의 국수는 모두 20HKD에서 30HKD,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3000원에서 4500원 사이로 저렴하다. 아침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영업한다는 사실까지 듣고 나면 감탄을 넘어 무뚝뚝한 식당 종업원들에게 감사해질 지경이다.
타이헤탕량 차관(Taihe Tang Ryang Cha Kwan) - 한 끼 식사로도 손색없는 홍콩 디저트 찻집 -
분주한 퉁초이 스트리트를 내려오다 문득 걸음을 멈춘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조금 쌉싸름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그 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타이헤탕량 차관의 입구가 보인다.
타이헤탕량 차관은 옛 홍콩식 디저트를 판매하는 찻집이다. 좁고 깊은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시대를 성큼 역행한 듯 아득한 기분이 든다. 골동품 같은 나무 의자에 기대 앉아 영문 메뉴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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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메뉴는 광둥의 전통 디저트 형식 ‘탕수이(糖水)’에 기반한다. ‘단 물’이라는 뜻 그대로 탕수이는 달콤한 수프를 곁들인 후식이다.
코코넛 밀크, 시럽에 잠긴 두부, 흑임자 수프 등과 달콤하게 졸인 토란, 말랑말랑한 사고(sago), 열대과일 등 다채로운 내용물의 조합은 80여 종이 훌쩍 넘는다. 양질의 탄수화물이 든든하게 포함된데다 양도 넉넉해 간단한 아침 식사로도 손색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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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특별한 것을 시도해보고 싶다면 중국식 허브티(Chinese Herbal Tea) 가운데 하나를 주문해보자.
각각의 메뉴에는 맛에 대한 설명 대신 ‘두통’, ‘오한’, ‘독소’ 등 병원에서 등장할 법한 용어들이 붙어 있다. 홍콩 사람들은 건강이 나빠지거나 기력이 부족할 때 약국에 가는 대신 찻집에 와 중국식 허브티를 한 잔씩 마신다. 맛도 향도 차보다 쌉싸름한 약재에 가깝지만, 홍콩의 민간 처방을 경험해보는 것은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는다.
힝키 레스토랑(Hing Kee Restaurant) - 백종원도 반한 홍콩식 솥밥 -
야우마떼이는 오래된 틴하우 사원과 활기찬 청과 시장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사원 근처의 녹음과 그 아래에서 쉬는 사람들 때문에 한낮의 풍경은 느긋하지만, 해가 지고 나면 낮보다 더욱 바쁘고 활기찬 밤이 시작된다.
야우마떼이는 홍콩식 솥밥 뽀짜이판(Claypot Rice)의 메카다. 전통적인 뽀짜이판은 중국식 소시지와 삼겹살, 양파를 밥과 함께 쪄낸 후 간장과 피시소스, 설탕, 후추 등 다양한 향신료로 만든 소스를 섞어 먹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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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우마떼이의 뽀짜이판 가게들은 여러 육류와 해산물을 사용해 수십 종의 메뉴를 선보인다. 막 날라온 도자기 솥에서는 하얀 증기와 맛있는 냄새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솥에 가해진 강한 화력 덕분에 바삭하게 익은 쌀알의 식감이 즐겁고, 맥주 한 잔씩 손에 들고 솥밥을 비비는 사람들의 활기에 기분이 들뜬다.
심야까지 떠들썩하게 흥청이는 일대의 풍경은 홍콩 최고의 밤참 장소라 부를 만하다. 여러 가게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반가운 이름은 힝키 레스토랑(Hing Kee Restaurant)이다. 백종원 셰프가 스트리트푸드파이터에서 솥밥 한 그릇과 홍콩식 굴전을 뚝딱 먹어치운 곳이 바로 여기다. 뽀짜이판을 비운 후에도 일어나기 아쉽다면 다양한 해산물 메뉴들로 밤을 이어가보자.
블락 18 도기스 누들(Block 18’s Doggie Noodle) - 맛과 가성비에 놀라는 뉴트로 누들 -
블락 18 도기스 누들에서 한끼를 해결하는 일은 일종의 시간여행이다. ‘도기스 누들’은 20세기 중반 홍콩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국수의 한 형식이었다.
수제비와 국수의 중간 정도, 뚝뚝 끊어진 면발은 어쩌면 파스타와도 닮았다. 세월이 흐르며 명맥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지만, 블락 18 도기스 누들이 미슐랭 가이드 빕 구르망에 선정되며 홍콩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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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옛 입맛에 공감하기 어려운 이방인에게도 이곳은 흥미롭다. 식당보다는 노점에 가까워 길가에 앉아 먹어야 한다는 사실도, 영어가 통하지 않는 불편함도 ‘B급 구르메’의 거칠지만 강렬한 매력을 잠식하진 못한다.
건어물과 향신료를 잔뜩 사용한 도기스 누들 위로 중국식 채소 절임을 올려 먹거나, 시원한 국물에 가짜 샥스핀을 곁들인 오리 국수를 즐겨보자.
삼수이포, 홍콩 사람들의 비밀 맛집 리스트 -
삼수이포는 오랫동안 여행지로 주목 받지 못했다. 홍콩 서민들의 주거지이자 번화가로 역사를 이어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이곳은 가벼운 지갑과 까다로운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맛집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홍콩의 어느 도심보다 독특하고 선명한 활기로 약동하는 삼수이포의 중심가를 걷는다. 색색의 건물들과 가지를 드리운 보리수 사이로 각양각색의 음식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기막히게 맛있는 군만두와 홍콩 최고의 두부 푸딩, 진정성 넘치는 옛날식 카트누들을 맛보기 위해, 홍콩 사람들은 먼 길을 마다 않고 삼수이포로 흘러든다. 가격 또한 경이롭다. HKD 40 정도면 배부르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진정한 맛과 향의 모험이 삼수이포에서 시작된다.
유엔퐁 만두 가게(Yuen Fong Dumpl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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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퐁 만두 가게는 겉보기엔 네온사인 하나 없는 낡은 점포에 불과하지만, 이곳의 군만두를 먹기 위해 홍콩 섬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오전 나절 가게에 들어서면 만두를 빚고 있는 직원들이 보인다. 분주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부터 노포 특유의 노련함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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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지만, 그들이 택하는 메뉴는 비슷비슷하다. 자그마한 만두들이 뽀얀 생선 국물 아래 잠겨 있는 물냉이 만둣국 혹은 바삭하게 구운 부추 고기 군만두다.
만둣국에 사용한 재료 물냉이(Cresson)는 프랑스 고급 요리에 사용되는 채소다. 하늘하늘한 만두피, 물냉이의 아삭한 식감과 신선한 향기가 입 안에서 즐겁게 섞인다.
보기 좋게 갈색으로 익은 부추 군만두는 한 입 깨무는 순간 육즙이 사방으로 튄다. 무엇을 선택할까 고민된다면 그냥 둘 다 먹어버리자. 대부분의 메뉴가 4000원 이하라 부담 느낄 필요도 없다.
컹와 두부 공장(Kung Wo Beancurd Fa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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컹와 두부 공장의 실내는 비좁고 언제나 인파로 가득하다. 낯선 현지인들과 합석해야할 가능성 또한 높다. 그러나 쾌적함과 거리가 먼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늘 손님들로 붐비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1960년대부터 삼수이포에서 역사를 이어온 컹와 두부 공장은 ‘홍콩 최고의 두부 푸딩’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두부를 디저트로 즐겨왔다. 이곳의 시그니처 두부 푸딩을 한 입 삼키고 나면 그 이유를 단숨에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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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달콤함이 입 안을 채우고, 두부 조각은 비단처럼 부드럽게 목구멍 뒤로 미끄러진다. 갓 만든 두부 푸딩은 프랑스 디저트 ‘크렘 부를레’에도 곧잘 비교된다.
바삭바삭한 딥 프라이드 토푸(Deep Freid Tofu), 고소하고 향기로운 두유(Soy Milk) 또한 인기 높다. 그야말로 ‘홍콩의 클래식’이라 부를 만한 가게다.
만께이 카트 누들(Man Kee Cart Noo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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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람들은 어떤 식재료로도 국수를 만들 줄 안다. 육류와 해산물, 채소는 기본이다. 쇠고기 내장, 다양한 만두, 동글동글하게 빚은 어묵, 튀긴 생선 껍질 등 경이로운 포용력은 토핑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쌀국수, 에그누들, 바람에 말린 이푸 누들까지 사용하는 면의 종류 또한 많다. 이쯤 되면 홍콩 국수의 미덕은 다양성이라기보다 유연함이라고 말해야겠다. 삼수이포의 카트 누들 식당 만께이는 혼란스럽지만 맛있는 국수의 세계로 입장하는 통로다. 카트 누들은 수십 가지의 토핑과 다채로운 면, 육수를 손님이 직접 선택하는 홍콩의 옛 국수 노점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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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식재료 목록으로부터 가능한 조합의 수는 수백에 이른다. 메뉴는 낯선 어감으로 가득하지만, 마음 가는 대로 고른 후 그 우연의 풍미를 맛보는 것 또한 여행자의 기쁨이다. 보다 안전한 선택을 원한다면, 부드러운 쇠고기 양지(Chuhau Beef Brisket)와 달콤한 스위스 치킨 윙(Swiss Chicken Wing), 가게에서 직접 제조한 칠리 소스(Special Chilli Sauce)를 토핑으로 택해보자.
이 시끌벅적한 국수집은 현지인들 사이에서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한 블록에 매장을 3개나 오픈한데다 미슐랭 스트리트 푸드 가이드에서도 호평 받았다.
선흥유엔(Sun Heung Yu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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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둥 남쪽의 작은 섬에 영국 해군이 상륙하기 전까지 홍콩이라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홍콩의 식탁에서 서양와 동양의 전통이 서로 섞이는 건 당연했다. 수 많은 이종교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결과가 차찬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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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찬탱은 홍콩식 밀크티와 커피, 맛있는 족발 국수와 투박한 프렌치토스트가 공존하는 찻집이다. 삼수이포의 오래된 차찬탱 선항옌 또한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지만, 이 식당의 명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콘비프 샌드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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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릇하게 구운 토스트 사이 스크램블드에그와 짭짤한 콘비프를 끼워내는 것이 전부. 동서의 만남을 더욱 독특하게 즐기고 싶다면, 지난해 본점 인근에 오픈한 2호점을 찾아가보자.
2호점에서만 판매하는 사천식 콘비프 샌드위치(Sichuan Cornedbeef Sandwich)는 기름지고 육중한 맛 사이 마라의 향을 더해 식욕을 한층 자극한다.
취재협조=홍콩관광진흥청
- 글= 정미환 작가
- 편집= 이주상 기자 jsf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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