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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바니타스와 기명절지도

  • 심형철 박사·국제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전공 교수
기사입력 2025.03.05 06:00
  • 서양의 그림 중에 <바니타스 정물>이 있다. ‘바니타스’란 라틴어로 '공허', '허무' 등의 의미다. 이 말은《성경》의 <전도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며 사용되었고, 인생의 덧없음이나 세속적 가치의 한계 등을 일깨우는 경구가 되었다. 

    <바니타스 정물>은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는데, 그림 안에는 서로 연관성이 적은 이질적인 것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있다. 그림의 소재는 왕관, 보석, 악기, 책, 술잔, 담배 파이프, 촛불, 꽃, 과일, 시계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특히 보는 이가 섬뜩할 수 있는 해골까지도 그렸다. 

    우리 전통 그림에도 다양한 소재들을 한꺼번에 그린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가 있다. 이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 <바니타스 정물> 부분, 에버트 콜리어 /출처=위키미디어 공용(Wikimedia Commons)
    ▲ <바니타스 정물> 부분, 에버트 콜리어 /출처=위키미디어 공용(Wikimedia Commons)
  •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고희동ㆍ이도영 /출처=국립중앙박물관
    ▲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고희동ㆍ이도영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기명절지도>란 진기(珍奇)한 그릇(器皿)과 꽃가지(折枝), 과일, 채소 등을 평면적으로 배치하여 그린 정물화의 일종이다.

    위의 <기명절지도>를 보면 함께 진열하기에는 어색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오른쪽에서부터 무, 쏘가리, 주전자, 고추, 옥수수, 복숭아, 비파, 딸기, 수박이 그려져 있다. 

    무를 한자로 “채두(菜头)”라고도 하는데, 행운을 뜻하는 “채두(彩头)”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무는 행운(재복)을 상징한다. 그리고 쏘가리를 한자로 궐(鱖)이라 하는데, 궁궐의 궐(闕)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쏘가리는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상징한다. 쏘가리가 두 마리인 것은 당시의 관리 선발제도인 과거시험과 관련이 있다. 관리가 되려면 향시(鄕試)와 회시(會試)에 모두 합격해야 했기 때문에 쏘가리 두 마리는 두 번의 과거시험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추, 옥수수, 수박은 다산(多産)을 상징하고, 딸기는 덩굴이 뻗듯 자손이 번성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복숭아는 장수를 뜻하고, 골동품 주전자는 높은 신분을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비파(枇杷)는 황금색이어서 재부(財富)를 나타내기도 하고, 모양이 둥글어서 가정의 화목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위 <기명절지도>는 자손 번성하고, 출세하고, 부귀하고, 장수하라는 축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인간이 현세에서 이루고 싶은 모든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의 <바니타스 정물>이 인생의 허무함을 표현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다시 곰곰 생각해 보면 두 그림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의 <바니타스 정물>이 인생은 유한하고 무상한 것이니 항상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우리의 <기명절지도>는 그림이 상징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기고받은 내용으로 디지틀조선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심형철 박사·국제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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