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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책가도와 책거리도

  • 심형철 박사·국제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전공 교수
기사입력 2025.02.26 06:00
  • 17세기 서양의 상류층에서 ‘분더카머’라는 공간이 유행하였다. 이 공간은 ‘경이의 방’ 또는 ‘호기심의 방’이라고도 하는데, 르네상스를 거쳐 대항해시대를 관통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진귀하고 신기한 물건, 호기심을 유발하는 물건들을 진열해 놓은 진품실(珍品室)이다. 귀족들은 다양한 것들로 가득 채운 이 공간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였다.

    이 유럽의 그림이 중국 청나라에 전해지면서 도자기나 옥, 귀중한 골동품 등 진귀한 것들을 진열한 상류층 집안의 장식장을 그린 ‘<다보각경도(多寶閣景圖)>’ 혹은 ‘<다보격경도(多寶格景圖)>’가 되었다. 중국의 이 그림은 18세기 후반 조선에 들어와 <책가도(冊架圖)>라는 양식으로 탄생하였다.

  • <책거리도> /출처=Wikimedia Commons
    ▲ <책거리도> /출처=Wikimedia Commons

    <책가도(冊架圖)>는 책과 문방사우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물들이 그려진 정물화로 18세기 후반 정조(正祖) 시기에 화원이 제작한 것이 시초일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는 어좌 뒤에 배치하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병풍을 <책가도> 병풍으로 바꿀 정도로 <책가도>를 장려하였다고 한다. 

    <책가도>를 다른 말로 <책거리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19세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책가도>는 책과 물건들이 책장에 진열된 것을 그린 것이고, <책거리도>는 책장은 사라지고 바닥에 늘어놓은 책과 물건들을 그린 것으로 두 그림은 같은 듯 다르다. 궁중에서 시작된 고급스러운 <책가도>가 서민들이 소장하고 싶은 <책거리도>가 되었다.

    그림 안에는 학문과 배움을 상징하는 책과 문방구 등을 중심으로 매우 다양한 물건들이 있다. 이것들은 주로 다산을 상징하는 수박, 석류, 포도, 장수를 상징하는 불수감, 복숭아, 그리고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골동품, 평안을 상징하는 화병, 만사여의형통을 의미하는 여의(如意) 등이다. 즉, <책거리도>는 ‘출세와 장수부귀’라는 인간의 소망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 속의 물건 중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들은 모두 수입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민들이 소장할 수 없는 물건으로 서민들의 소망을 그렸다는 것은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라는 의미는 아닐까?

    ※ 본 기사는 기고받은 내용으로 디지틀조선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심형철 박사·국제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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