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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배추와 감

  • 심형철 박사·국제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전공 교수
기사입력 2024.11.20 06:00
  • 김장의 계절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지지리도 가난했던 우리 민족 최고의 월동 식품은 바로 배추김치였다. 어린 시절, 김장은 마을 일과 같아서 집집마다 김장하는 날을 엇갈리게 정한 후 품앗이로 일손을 보탰다. 한 집에 배추 300포기는 기본이었고, 먹을거리가 별로 없었던지라 김치 한 가지만을 겨우내 먹고 또 먹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봄이 오기 전에 남은, 시다 못해 쉰 김치는 부침개 부쳐 먹거나 만두로 만들어 먹었다.

    김장하는 날이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배추전을 부쳐 간식으로 먹었는데, 그땐 맛이 심심하기만 한 배추전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몰랐다. 그러나 갖은양념을 한 김칫소를 잘 절인 노란 배추 속잎에 싸서 입에 넣으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너무 많이 먹어 속은 쓰렸어도 그때의 기억만큼은 달콤하고도 따뜻하다. 돼지고기를 삶아 보쌈으로 싸 먹기 시작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이렇게 흔하고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배추를 그려 인간의 도리는 물론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그림이 있다. 배추에 이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니 놀랄 일이다.

  • (왼쪽)<사사청백(事事淸白)>, 제백석, (오른쪽)<세세청백(世世淸白)>, 제백석 /출처=<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도서출판 민규
    ▲ (왼쪽)<사사청백(事事淸白)>, 제백석, (오른쪽)<세세청백(世世淸白)>, 제백석 /출처=<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도서출판 민규

    예부터 ‘꽃 중의 왕’은 ‘목단’, ‘과일의 왕’은 ‘여지’, ‘채소의 왕’은 ‘배추’라고 했다. 배추를 한자로 백채(白菜)라고 하는데, 배추의 푸르고 흰 색깔 때문에 청백채(靑白菜)라고도 한다. 우리말 배추의 발음은 중국어 바이차이(白菜)에서 왔다. 

    청백채의 청백(靑白)과 두 그림의 제목에 들어 있는 청백(淸白)의 발음이 같다. 때문에 배추 청백(靑白)을 청백(淸白)으로 읽고, 그 뜻은 ‘명백하다, 분명하다’이다. 그래서 배추를 그린 그림은 ‘순리대로 분명하게’라는 뜻이다. 

    성품과 행실이 올바르고 사적인 욕심을 탐하는 마음이 없는 관리를 ‘청백리(淸白吏)’라고 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매일 이 그림을 보며 ‘청백’의 정신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배추만을 그린 그림은 푸른색은 푸르게 흰색은 희게, 즉 ‘순리대로’라는 뜻을 나타내는데, <사사청백도(事事淸白圖)>와 <세세청백도(世世淸白圖)>를 보면 배추와 함께 감이 그려져 있다.

    감 시(柿, shì)는 일 사(事, shì)와 중국어 발음이 같다. 그래서 두 개의 감 + 배추 = 사사(事事) + 청백(淸白)이고, “하는 일마다 모두 분명(공명정대)하기 바란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감 시(柿, shì)는 대 세(世, shì)와도 중국어 발음이 같다. 그래서 두 개의 감 + 배추 = 세세(世世) + 청백(淸白)은 “(해마다)늘 명명백백(明明白白)하기 바란다”는 뜻이다. 

    이 그림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그 뜻을 새긴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윤리교육이 없을 것이다. 특히 나라의 공복(公僕)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이 그림을 걸어두고 그림의 의미를 새기고 또 새기면 좋겠다. 

    ※ 본 기사는 기고받은 내용으로 디지틀조선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심형철 박사·국제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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