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23일 오후 성수에서 ‘OTT와 한류’를 주제로 한 해를 마무리 하는 행사를 열었다. 행사에는 유현준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 교수, 김숙영 UCLA 연극·공연학과 교수,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상품유통전략팀 이승은 차장,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이상윤 한류 PM,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가 참석해 한류의 현재와 미래를 논의했다.

유현준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 교수(사진제공=넷플릭스)

‘경계없는 OTT시대, 건축학적·도시학적 관점에서 OTT는 한국을 어떻게 바꿨나?’를 주제로 강의한 유현준 홍익대 교수는 "15세기 삼각돛이 도자기 무역을 가능하게 했고, 그 도자기에 그려진 정원 그림이 유럽 조경 양식을 바꿨다"며 "첨단 제품을 수출하는 나라의 문화가 세계를 움직인다"고 말했다. 2025년 한국이 그 자리에 섰다는 진단이다.

유현준 교수는 한국 문화가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된 배경을 기술력에서 찾았다. “1999년 NBC 아침 방송에서 전 세계 핸드폰 방수 실험을 했는데, 삼성전자 제품만 물에 담갔다 꺼내자마자 개통됐다”며 “그때부터 한국이 첨단 제품을 만드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이미지가 K-드라마와 K-팝을 보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역사적 사례로 15세기 유럽의 '중국풍(Chinoiserie)' 열풍을 들었다. 삼각돛 발명으로 도자기 무역이 가능해지자 당시 최첨단 제품이었던 중국 도자기가 유럽을 휩쓸었고, 도자기에 그려진 정원 그림이 유럽인들의 라이프스타일까지 바꿨다는 것이다. “센트럴파크 같은 자연스러운 풍경의 조경 양식이 모두 동양 정원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며 “지금 K-콘텐츠 속 한국 공간과 삼겹살 굽는 장면이 전 세계로 퍼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분석했다.

유 교수는 한국의 세 번째 공간 혁명으로 K-콘텐츠 수출을 꼽았다. 첫 번째가 아파트를 통한 수직 공간 창출, 두 번째가 1990년대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이었다면, 세 번째는 OTT 플랫폼을 통한 문화 콘텐츠 수출이다. “가상 공간에 제일 먼저 들어간 덕분에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 콘텐츠를 빠르게 수출할 수 있는 타이밍이 좋았다”고 평가했다.

미국이 증명한 K-컬쳐 파워
30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며 젊은 소비자들의 한국 문화 인식 변화를 연구해온 김숙영 UCLA 교수는 2025년을 ‘획기적인 해’로 규정했다. “1996년 미국에 갔을 때 K-팝 데몬 헌터스 같은 콘텐츠로 아이들이 열광하고, 스트레이키즈가 빌보드 차트 8회 연속 1위를 한다고 누가 말했다면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숙영 UCLA 연극·공연학과 교수(사진제공=넷플릭스)

김 교수가 제시한 2024년 미국 K-컬처 현황은 놀라웠다. 11월 27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메이시스 백화점 추수감사절 퍼레이드에 K-팝 데몬 헌터스의 상징인 뚜비가 등장했다. 100년 넘은 전통 행사에 한국 캐릭터가 칠면조와 함께 행진한 것이다. 코스트코는 'K-뷰티'를 강조한 화장품 선물세트가 완판됐고, 매디슨스퀘어가든(뉴욕 닉스 경기장)에 한국 치킨집이 입점했다. CBS 선데이모닝은 "올해 미국 내 한국 치킨 시장이 22% 성장했다"고 보도했다.

김 교수는 미국 Z세대(13~35세)의 특성에 주목했다. 911 테러, 서브프라임 사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트럼프 당선, 미투 운동,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자란 세대다.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탐색하고 다양성을 중시하지만 온라인 소통을 선호하며, 가성비와 품질을 동시에 고려한다"며 "낯설지만 익숙한 편안한 문화에 대한 갈망이 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18년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 Z세대의 30%가 "미국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다"고 답했으며, 62%가 "다양성이 클수록 사회에 유익하다"고 응답했다. 빌보드가 올해 조사한 K-팝 팬덤 통계도 의미심장하다. 응답자의 48%가 13~24세 여성이었고, 대다수가 일주일 내내 K-팝을 청취하며, 36%가 5년 이상 팬으로 활동했다. 특히 팬 분포가 캘리포니아, 뉴욕 등 대도시가 아닌 전국에 균등하게 나타났다. "지역과 정치 성향을 떠나 K-팝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커뮤니티 소속감을 준다"는 분석이다.

K-드라마는 더 놀라운 데이터를 보여줬다. 넷플릭스 K-드라마 시청자의 30%가 히스패닉이다. 전체 넷플릭스 구독자 중 히스패닉 비율이 17%인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이다. 김 교수는 "히스패닉은 2060년 캘리포니아 인구의 과반수가 될 전망"이라며 "이들에게 K-드라마가 인기 있다는 것은 미래가 밝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새벽 4시 박물관 대기줄, 매출 400억 돌파한 '스토리텔링의 힘'
이승은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차장은 올해 7월 K-팝 데몬 헌터스 공개 이후 체감한 변화를 생생하게 전했다. "16년째 박물관에 근무하는데, 개장 전 새벽 시간에 사람들이 산처럼 대기줄을 선 모습은 처음이었다"며 "어떤 분은 굿즈를 사려고 새벽 4시 반에 왔다고 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 김숙영 UCLA 연극·공연학과 교수,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상품유통전략팀 이승은 차장,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이상윤 한류 PM(사진제공=넷플릭스)

놀라운 것은 매출 수치다. K-팝 데몬 헌터스 공개 시점을 기준으로 전월 대비 100% 매출이 상승했고, 12월 말 기준 박물관 굿즈 브랜드 '뮤즈'의 매출액은 306억원을 돌파했다. 연말까지 400억원 돌파가 확실시된다. 더 주목할 점은 7월 이후 12월까지 매출 증가세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시적 유행이 아닌 구조적 변화다.

이 차장은 성공 비결로 ‘스토리텔링과 유머’를 꼽았다. "과거엔 유물 이미지를 그대로 굿즈에 인쇄했다면, 최근엔 유물의 스토리를 담기 시작했다"며 구체적 사례를 제시했다. 평안감사향연도에 등장하는 선비 3명을 골라 소주잔에 인쇄하고, 특수 안료를 사용해 차가운 소주를 부으면 볼이 빨개지도록 만든 것이다. "MZ세대가 박물관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박물관이 대중화됐다"고 평가했다.

이상윤 코트라 한류 PM은 11월 뉴욕 한류박람회 현장 경험을 공유했다. 국내 중소기업 400개사가 참가한 이 행사에서 현장 계약 1,100만 달러, 판매액 9억원을 기록했다. "더 이상 한국 제품이 저가 신흥 브랜드로 인식되지 않는다"며 "한류를 통해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잡았다"고 강조했다.

수치로 입증된 한류 효과도 제시했다. 화장품, 식품, 생활용품, 패션 등 한류 연계 4대 품목의 수출액이 2020년 39억 달러에서 2024년 66억 달러로 70% 증가했다. 특히 K-뷰티는 작년 북미 화장품 수입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며 프랑스를 제쳤다. 라면은 11년째 수출 상승세를 이어가며 2025년 15억 달러 달성이 예상된다.

패널들은 K-컬쳐가 21세기 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로 'OTT 플랫폼'을 지목했다. 김숙영 교수는 "한국 문화는 힘이 있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있었는데, 과거엔 그것을 세상에 들려줄 확성기가 없었다면 이제는 확성기를 확보했다"며 "코로나 기간을 거치며 온라인 콘텐츠가 날개를 달았고, 서브컬쳐를 넘어 메인스트림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전망도 낙관적이었다. 김 교수는 UCLA 박사과정생이 뉴진스 민지의 목소리를 분석한 리포트를 제출한 사례를 들며 "유행이 지식 체계로 정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승은 차장은 "'왜 한국이어야 하는가'라는 콘텐츠가 꾸준히 공급돼야 하며, 글로벌 스탠다드 품질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윤 PM은 "보는 문화를 넘어 쓰는 문화로 전환돼야 지속가능하다"며 "인증, 유통망 등 인프라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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