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그 자체였던 '파반느' 시간에 대하여…이종필 감독 [인터뷰]
통창으로 가득 햇살이 쏟아져 눈부신 날이었다. 이종필 감독은 인터뷰 중 배우 고아성의 이야기를 하다가, "준비해 온 게 있어요"라며 주섬주섬 에코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편지와 '월간 미정'이라는 손바닥만 한 인디 매거진이었다. 영화 '파반느'가 공개된 후, 고아성에게 받은 것이었다. 고아성은 2010년부터 '파반느' 속 자신의 캐릭터 이름 '미정'이 담긴 인디 매거진을 사서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다가, 공개된 후 그것을 이종필 감독에게 편지와 함께 선물했다.
이종필 감독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보다 앞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원작으로 한 멜로 영화를 꿈꾸고 있었다. 박민규 작가의 소설을 정말 많이도 읽었고, 필사도 해봤다. 이야기하는 주체를 경록(문상민)으로 바꿔보기도 하고, 삼인칭으로 달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써보기도 했다.
'파반느'는 화려한 명품들이 가득한 백화점의 지하에서 만난 세 명의 청춘, 요한(변요한), 경록(문상민), 그리고 미정(고아성)은 함께 만나 자신만의 '빛'을 발견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이종필 감독이 배우 고아성, 변요한, 문상민과 함께 작업한 '파반느'의 과정도 소설 속 그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분명,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했었다.
Q. 영화 '파반느' 속에는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달라진 지점도, 달라지지 않은 지점도 있다. 그런데 '파반느'를 보고나면, 소설 속 좋아했던 글들은 다 살아있어서 묘하게 마음을 울린다. 원작 소설을 아주 좋아했던 마음이 느껴졌다.
"정말 많이 읽었다. 필사도 해봤고, 시점을 경록으로 바꿔서, 미정으로 바꿔서, 요한으로 바꿔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써 내려가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 글을 감히 고칠 수가 없다'라는 생각에 있는 그대로 시나리오로 써보기도 했다. 너무 길어졌다.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원작 속 '못생긴 여자'로 그려진 미정이었다. 영화는 그 모습이 드러나야 했기에 '못생긴 여자'라고 검색을 해보기도 했고, 잠들기 직전까지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눈뜨자마자 그 모습을 생각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소설에는 왜 못생긴 여자가 등장하는지 다시 생각해 봤다. 소설은 명확하게 1985년이라는 시대가 나온다. 성장하던 한국 사회에서 놓치고 가는 것은 없는가라는 지점을 다루기 위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도 원작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영화에 담고 싶었던 건 20대 시절,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사랑, 삶의 공기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Q. 그런 수많은 고민 속에, 고아성을 캐스팅하며 '미정'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이전에 고아성과 류현경과 셋이 만난 적이 있다. 제가 '파반느'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고아성이 '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저는 '당신은 너무 예쁘잖아'라고 답했다. 그때 '저는 이 인물의 눈을 표현할 수 있어요'라는 고아성의 한 마디가 저를 띵하게 했다. 그 말에서 모든 것이 풀렸다. 못난 얼굴이 핵심이 아니었다. 핵심은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는 초라한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초라해지고, 자신없어지는 마음이 있지 않나. 그래서 외모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Q. 그런 많은 고민 속에, 고아성을 캐스팅하며 '미정'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이전에 고아성과 류현경과 셋이 만난 적이 있다. 제가 '파반느'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고아성이 '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저는 '당신은 너무 예쁘잖아'라고 답했다. 그때 '저는 이 인물의 눈을 표현할 수 있어요'라는 고아성의 한 마디가 저를 띵하게 했다. 그 말에서 모든 것이 풀렸다. 못난 얼굴이 핵심이 아니었다. 핵심은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는 초라한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초라해지고, 자신 없어지는 마음이 있지 않나. 그래서 외모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Q. 배우 고아성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다. 언제 '파반느' 작업에 들어갈지 캐릭터 이름처럼 '미정'인 상태에서 보여주신 인디 매거진 '월간 미정'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작품에 진심이었다. 작업을 하면서 느낀 단상이 있을 것 같다.
"고아성이 '파반느'의 보이지 않는 프로듀서라고 생각한다. 합류하기로 한지, 8~9년 정도 됐다. 저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됐다. 미팅하고, 미팅을 마치면 백화점 지하 주차장을 탐방하러 다니고, 노포를 찾아다니고 했다. 그렇게 갔던 노포 중에서 '파반느'가 아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등장하게 된 장소도 있다. 몇 해 전에 한 영화제에서 어떤 감독님을 만났는데, 그 감독님께서 자신의 멜로 영화에 고아성과 하고 싶었는데, '영화 '파반느'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파반느'를 촬영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때도 고아성은 '월간 미정'을 부적처럼 사서 들고 다닌 거다. 제가 고아성을 다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형용할 수 없다. 많은 분들이 더더더더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배우다. 고아성이 지닌 감동이 있다. 미정 그 자체다."
Q. 배우들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니, '요한' 역의 변요한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과거 독립영화 속에서 보였던 유려한 모습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요한이 한껏 높게 올라갔다가 탁 그늘이 져버리는 그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막연하게 '요한'은 배우 변요한이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제작사를 통해 변요한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했는데 읽고 바로 '하겠다'라고 답변이 왔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로 답한 이유를 알겠더라. 변요한은 이 연기를 너무 잘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지나온 20대 때, 눌려있다가 터지고, 유쾌하다가도 허무하고, 친해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했던 그 시기의 바이브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영혼은 록 스피릿인데 촬영하는 내내 마지 재즈 연주자 같았다. 요한이 'Hope' 주인에게 '맥주나 한잔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시나리오에는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변요한이 나가다가 다시 쓱 고개를 내밀고 '사랑해요'라고 하더라. '오늘은 이걸 해야지'라는 계산이 아닌 것 같았다. 즉흥 잼 연주자 같다."
Q. 태생이 '경록' 같았던, 문상민 이야기도 궁금하다. 촬영 전, 아침 6시부터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는 10시까지 매일 회의를 했고, 그 시간을 지나 촬영에 들어가면서 느낀 지점이 있을 것 같다.
"'파반느'에는 정해진 시대가 없다.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초반 등 다양한 시대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가 20대일 때의 시대를 말하는 것 같다. 그 시대를 모호하게 담고 싶었다. 그래서 '경록'은 20대 배우가 해주길 바랐다. 문상민은 굉장히 순수하고, 연기에 대한 열정도 엄청나다. 그런데 그걸 티 내려 하지 않는다. 아이슬란드 촬영까지 마친 후, 눈이 오는 겨울을 기다렸다가 추가 촬영을 했다. 눈 덮인 길, 눈 쌓인 표지판 등 인서트 장면만 찍으러 갔는데, 예쁘게 내리는 눈이 너무 소중하더라. 문상민에게 전화했다. 그랬더니 받자마자 '갈까요?'였다. 춘천까지 매니저와 둘이 내려왔다. 문상민이 버스정류장까지 달려가는 장면을 찍었다. 영화에 달리던 경록이 넘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의도한 게 아니고 진짜 넘어졌다. '괜찮냐?' 물어보니, '괜찮다'라고 하더라. 다음 날 분장팀에게 들어보니, 조금 찢어졌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하나 티를 내지 않는다. 경록이 같은 친구다."
Q. '파반느' 엔딩 크레딧에 부승관의 이름이 있는 건, 문상민과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세븐틴 멤버 부승관일까.
"부승관이 '파반느' 촬영 때 커피차도 보내줬고, 응원하기 위해 직접 현장에 오기도 했었다. 와서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에너지 드링크를 들고 서있더라. 그리고 촬영을 마친 뒤 '저는 (문)상민이 친구 부승관입니다'라고 인사해 줬다. '파반느'에서 문상민이 배드민턴을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문상민이 배드민턴을 굉장히 잘 친다. 부승관과 복식조로 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았다고 하더라."
Q. 영화 속에 나오는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요한이 노래방에서 부르려 했던 곡의 제목은 바둑산의 '사랑뿐이다'였다. 또 경록과 미정이 LP로 듣는 곡은 임민휘의 '그런 마음 아나요'였다. 어떻게 등장하게 됐나.
"어렸을 때 동네에 뒷산이 있었다. 작은 산이었는데, '바둑산'이라고 불렀다. '사랑이란 무엇이냐'라는 대사와 연결되는 곡을 생각하다가 '사랑뿐이다'를 노린 거고, 옛날 밴드 이름을 떠올리다가 '백두산'이 떠올랐다. 그렇게 높고 크고 웅장하지 않지만, 작고 소중한 이름으로 '바둑산'이 연결되었다. 그렇게 넣었는데,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임민휘는 '그런 마음 아나요'를 작곡한 '파반느'의 이민휘 음악감독과 작사해 준 임유영 시인의 이름에서 만든 이름이다. 정말 옛날 한국가요 같아서 찾아보시는 분들도 있다. 없다. 만든 곡이다.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졌다."
Q. 지난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17주년 양장 특별판으로 발간됐다. 그 책에는 박민규 작가가 작품 속 인물들의 17년 후 이야기를 더했다. 물론 다르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파반느'와도 연결되어 있어, 다시 보니 마음이 몹시 아련했다.
"영화 '파반느'의 마지막 작업이 2025년 11월 19일에 끝났다. 마지막 믹싱을 마치고, 그 이후로 더 만진 적이 없다. 그날을 말씀드리는 건, 그 개정판이 나온 날이 그날이다. 이날 우연히 교보문고에 갔다가 그 책을 봤다. 띠지에 영화 '파반느'의 이야기가 있더라. 개정판이 나오는데, '아주 작은 독자였던 내가 조금은 기여했을까'라는 마음으로 펼쳤다. 그런데 그 후기를 보고 그 자리에서 울었다. 서점을 나오면서 고아성 배우에게 전화해서 이야기해 줬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고아성 배우도 울었다."
영화 '파반느'에는 대조적인 것들이 만들어내는 의미들이 있다.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 유쾌함과 우울함, 따뜻함과 차가움 등이 부딪히며 질문한다. 그런데 어둠보다 빛이 좋다고, 우울함보다 유쾌함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냥 그렇게 견디는 시간도 있다고. 그 시간을 지나는 이들은 사실 각자의 반짝임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파반느'를 작업하면서 이종필 감독과 배우 고아성, 변요한, 문상민, 그리고 수많은 스태프까지 함께 마주한 시간이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깊고 진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각자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