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SNUH.AI’ 출범으로 본 의료 AI 전환의 새 국면

인공지능(AI)이 단순한 진단 보조 도구에서 벗어나, 진료·행정·데이터 관리 등 병원 전반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운영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병원은 자체 개발한 의료 AI 운영 플랫폼 ‘SNUH.AI(스누하이)’를 지난 10월 29일 공식 오픈했다고 밝혔다. 이는 AI가 단순한 진단 보조 도구를 넘어 병원 운영 생태계의 일부로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서울대병원이 자체 개발한 의료 AI 통합 플랫폼 ‘SNUH.AI’ 메인 화면. 진료 문서 자동 생성, 에이전트 관리, 음성 기록 OCR 등을 지원한다. /사진 제공=서울대병원

SNUH.AI는 병원정보시스템(HIS)과 연동돼 마취 전 환자 상태평가서와 퇴원기록지 등 진료 관련 문서를 자동으로 생성한다.

서울대병원은 그동안 진료과별 연구자나 외부 기업이 개발한 AI 솔루션이 산발적으로 운영돼 일관된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번 플랫폼 구축으로 여러 AI를 통합 관리할 수 있게 됐다. 병원 측은 이를 통해 의료진의 행정 부담을 줄이고, 환자 진료 집중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서울대병원 헬스케어AI연구부는 SNUH.AI를 “AI를 병원의 인프라로 정착시키는 출발점”으로 정의했다.

이형철 헬스케어AI연구부원장은 “AI는 더 이상 연구 도구가 아니라, 병원 생태계의 일부로 작동하는 운영 기술이 되고 있다”며 “SNUH.AI는 의료진이 환자 진료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정확도 중심에서 운영 중심으로…의료 AI의 변곡점

국내 의료계의 AI 도입은 초기에는 영상 판독 보조 등 진단 중심 기술에서 출발했다. 폐 결절·뇌졸중 예측 AI, 병리 이미지 분석, 유방암 조기 진단 모델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는 알고리즘의 정확도와 재현율이 주요 경쟁 기준이었다.

하지만 최근 의료 AI는 ‘정확도’보다 ‘운영력’으로 평가받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서울대병원이 올해 3월 공개한 한국형 의료 거대언어모델(LLM)은 의사국가시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86.2%의 정확도를 기록해 실제 의사 평균(79.7%)을 넘어섰다. 이는 단순한 성능 경쟁을 넘어, 의료 데이터의 구조적 이해와 업무 통합 역량으로 평가 기준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SNUH.AI의 출범은 그 연장선에 있다. AI가 이제 개별 모델 단위의 ‘도우미’가 아니라, 병원 시스템의 실행자이자 조정자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의료 AI의 경쟁력은 ‘얼마나 정확한가’에서 ‘얼마나 일 잘하는가’로 옮겨가고 있다.

의료 AI의 진화 흐름. 진단 보조 중심 단계를 넘어 진료 행정 자동화와 통합 운영 인프라로 확장하고 있다. /그래픽=디지틀조선일보

AI, 의료진의 일하는 방식을 바꾸다

AI가 진료 현장 깊숙이 들어온 것은 서울대병원만의 변화가 아니다.

한림대학교의료원은 지난 7월 생성형 AI 플랫폼 ‘HAI(Hallym Artificial Intelligence)’를 도입해, 입원부터 퇴원까지 전자의무기록(EMR) 초안을 자동으로 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HAI는 97개 항목과 75개 프롬프트 조합을 통해 진료과별 기록을 자동화하며, 연간 약 8만 3,000시간의 문서 작성 시간을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서울아산병원은 AI 진료 음성인식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의료진과 환자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텍스트화하고, 핵심 정보를 자동 분류·요약해 의무기록에 반영한다. 응급실과 병동, 외래 등 16개 진료과에서 이미 활용 중이며, 응급 상황에서도 데이터 누락을 최소화해 환자 안전을 강화하고 있다.

용인세브란스병원은 LLM 기반 AI 도슨트 키오스크를 도입해 환자 안내 서비스를 제공한다. 음성 인식과 다국어 응답 기능을 탑재한 키오스크는 환자의 질의에 자연어로 답변하며, 접근성이 낮은 환자층에도 도움이 되도록 배리어프리 디자인을 적용했다.

이처럼 국내 병원들은 AI를 단순 보조 기술이 아닌 진료 프로세스의 중심축으로 확장하고 있다. AI는 의료진의 ‘업무 자동화 도구’를 넘어, 병원의 운영 방식을 재설계하는 핵심 기술로 자리 잡고 있다.

신뢰성과 안전성, 다음 과제는 ‘책임 있는 AI’

AI의 효율성이 높아질수록 데이터 보안과 신뢰성 문제도 함께 부상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연구팀은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의료에 적용할 경우, 악성 공격 시 최대 81%의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다수의 병원은 개방형 모델 대신 온프레미스(내부 구축형) AI를 선호하며, 데이터 유출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또한 SNUH.AI를 통해 병원 내부 데이터를 외부 서버와 분리된 환경에서 관리한다.

AI가 진료의 핵심으로 들어올수록, 기술의 신뢰성과 윤리적 기준을 강화하는 노력이 병원 경쟁력의 핵심 지표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대병원이 개최한 ‘SNUH.AI 오픈 워크숍’ 현장. 의료 AI기 병원 인프라로 정착하기 위한 전략이 논의됐다. /사진 제공=서울대병원

AI, 이제 병원의 두뇌가 되고 있다

AI는 더 이상 실험적 기술이 아니다. 서울대병원의 SNUH.AI 출범은 의료 AI가 ‘진단 보조 도구’에서 ‘운영 인프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분기점이다.

한림대의료원, 아산서울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주요 병원들도 잇따라 AI를 병원 전반의 프로세스에 결합하며 의료 운영의 디지털화를 가속하고 있다.

병원 간 경쟁의 기준 또한 바뀌고 있다. 이제는 ‘정확한 모델’을 보유하는 시대에서, ‘현장에서 작동하는 AI 시스템’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가 경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결국 의료 혁신의 관건은 기술의 정밀도가 아니라, AI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의료 현장에 녹아드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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