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17' 시대 봉준호 감독? "'은하철도 999' 속 기계 몸 장착하고 시나리오 작업 중일 것" [인터뷰]
* 해당 인터뷰에는 영화 '미키 17'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기생충'으로 작품상, 감독상 등 4관왕에 오르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로컬 영화제'에서 '글로벌 영화제'로 바꿔버린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기대감에 들썩였다. 심지어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애키, 마크 러팔로, 스티븐 연, 토니 콜렛 등이 '미키 17'에 합류했다. 기대를 안 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다.
'미키 17'은 2054년의 우주를 배경으로 한다. 2054년이면, 봉준호 감독이 85세가 되는 그렇게 멀지 않은 않은 시점이다. 그때 휴먼 프린팅이라는 기계가 개발되고, 프린터기에서 종이가 출력되듯이, 입력된 사람이 휴먼 프린터기에서 출력된다. 그렇게 입력되어 반복적으로 출력되는 사람은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하에 목숨을 잃기 쉬운 위험한 작업이나, 신약 개발 등에도 투입된다. 미키가 바로 그 '익스펜더블'이다. '미키 17'은 17번째 출력된 미키(로버트 패틴슨)가 사망한 줄 알고, 미키 18이 출력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미키를 둘러싸고, 미키를 사랑하는 여자친구 나샤(나오미 애키), 그의 친구 티모(스티븐 연), 그리고 미키를 고용한 행성 개척단 독재자 마셜 부부(마크 러팔로, 토니 콜렛) 등이 자리한다. 봉준호 감독은 에스프레소 7잔과 에너지 드링크를 몸에 넣으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내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Q. '미키 17'은 '봉준호'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에 비해 좀 쉽고, 재미있고, 귀여운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변화한 것과 관련, 의도한 작품의 톤앤 매너가 있을까.
"'미키'는 되게 착하고 얼빵한 인물이다. 측은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손해를 보고도 계속 웃기만 하고. 그런 상황에서 '미키 18'이 나와서 다 때려 부수니까 속이 시원해지는 면도 있지만, '미키 17'이 그만큼 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그런 주인공의 관점에서 영화를 쓰고 찍었고, 또 그 주인공이 망가지거나 부서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같은 게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제 영화 속 캐릭터들을 좀 가혹하게 대하는 편이었더라. 현실의 쓰라린 지점을 풍자하거나 보여주는 것까지 좋았는데, 그러다 보니 그 한복판에 있는 주인공들이 가혹하게 내몰린 경우가 많았다. 이번 '미키' 역시 그렇다. 심지어 죽는 게 직업이니, 아마 이보다 더 가혹한 상황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되지 않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그게 변화라면 변화랄까. 미키가 파괴되지 않게 해주는 게 사실 '나샤'이지 않나. 원작에도 둘의 사랑에 대한 묘사가 참 좋았다. 그 맥락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최초로 제 영화에서 사랑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 같다. '멜로 영화'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SF영화 속 일부지만,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Q. '미키 17'에서는 여러 포인트가 등장하지만, 특히 독재자 마셜의 아내인 '일파 마셜'(토니 콜렛)가 끝없이 '소스'에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영화에 '소스가 문명의 리트머스'라는 말도 나오지 않나. 일파의 여러 가지 허세가 담긴 거다. 콜로니제이션이라고 그들 스스로 부르는 여러 행성의 원정대, 우주 식민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들끼리의 경쟁도 있다. 저녁 식사 장면에서 마셜은 '우리 식민지는 이렇게 달라'라면서 5~6가지 소스가 있다는 허세가 있다. 그래 놓고서는 정작 큰 잘못도 아닌 미키에게는 식량을 반으로 줄인다고 하지 않나. 어떻게 보면, '설국열차' 때 가장 앞 칸에 타고 있던 어느 부부가 저지르는 행동 같다. 일파가 소스를 만드는 방을 봐도, 영화 전체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울긋불긋한 화려한 컬러와 이상한 미술품이 있는 공간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 같다."
Q. 마셜(마크 러팔로)의 이름이 두 단어로 이루어진 계엄(Martial Law)의 앞 단어와 같다. 염두에 둔 건가. 더불어 원작 소설인 '미키 7'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영부인 일파(토니 콜렛)를 등장시킨 이유도 궁금하다.
"원작 소설을 쓴 에드워드 애슈턴이 마셜로 설정해 둔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제가 2021년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정확하게 기억난다. 2021년 9월,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갈 때, 굉장히 기분 좋게 탈고하고, 프로덕션 쪽에 넘겨주고 베니스로 향했다. '미키 17'은 2021년 9월에 완성한 시나리오다.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독재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끔찍하면서도 매력이 있어야 한다. 또 부부가 독재자로 등장했을 때, 시너지 효과가 있다. 실제로 제가 고등학생일 때, 필리핀 전 대통령 마르코스와 그의 부인 이멜다의 온갖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기사가 쏟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블랙 코미디 같기도 하다. 이멜다 여사의 방에서 구두가 3천 켤레가 나왔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부부가 일으키는 이상한 상승효과가 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크 부부도 그랬다. 그 부부들이 벌인 행각이 독재자의 모델로 참고가 됐다. 여기에 마크 러팔로와 토니 콜렛을 부부로 대입해 보니 주체할 수 없이 흥분됐다. 두 분 모두 엄청나게 다작하셨는데, 같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조합도 너무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Q. 반면, 나샤(나오미 애키)가 보여주는 정치인의 모습에는 어떤 지점을 담고 싶었나.
"충분한 길이의 에필로그가 등장한다. 마셜(마크 러팔로)의 최후 이후에도 '친마셜'과 '반마셜'로 양분돼 의회에서 싸우는 모습도 반복된다. 그때 나샤(나오미 애키)가 정치인이 되기로 마음먹는 모습이 나오고, 당선된다. 하지만, 나샤가 연단 위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모두가 일어서서 '와' 환호하며 박수치지 않는다. 그냥 적당한 박수가 나오고, 일부에게는 그냥 (손뼉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초선 의원이 된 나샤는 휴먼 프린팅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자신의 연인인 미키(로버트 패틴슨)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연인과 함께 늙어가고 싶은 나샤의 마음이기도 하다. 대사에도 나오지만, 그런 개인의 순수하면서도 상식적인 마음과 정치가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좋은 정치 아닐까요?"
Q. 반면 얼음 행성의 토착 종족인 크리퍼들이 인간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평화롭다. 한편으로는 촛불 시위가 연상되기도 하는 지점이다.
"굳이 타임 테이블을 정리해 보자면, 제가 2021년에 시나리오를 썼다. 한국 대통령 선거 훨씬 이전이다. 그리고 2022년에 촬영했고, 2023년에 크리퍼 등 CG 작업(컴퓨터 그래픽)을 했다. 촬영하기 전에 만든 스토리보드에는 이미 모든 것이 담겨있는 상태였다. 크리퍼들이 벌판에 쏟아져 나와서 '조코를 돌려달라'라고 엄청난 시위를 한다. 명백한 대조라고 생각했다. 한쪽은 하나를 구하기 위해 모두가 나서고, 다른 한쪽은 미키(로버트 패틴슨) 한 명을 지목해서 반복해서 계속 죽이고 있지 않나. 모두에게 죽을 법한 위험한 일을 한 아이에게 비겁하게 '그게 네 일이잖아, 네가 사인했잖아'라고 말한다. 마마 크리퍼가 엄청난 협상가인 것 같다. 굉장히 짧게 말하지만, 대사 하나하나에 치명타들이 많다. 'WE SAVE. YOU KILL' 같은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없지 않나. 마셜(마크 러팔로)이 찌질한 독재자라면, 마마 크리퍼는 멋진 정치인의 모습인 것 같다. 위엄이 있고, 나름의 위트도 있다. 정치적인 거짓말도 할 줄 알고, 시기에 맞게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매력 있는 리더의 모습이다. 동물이나 크리처를 영화 속에 등장시키는 것은 그런 재미인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볼 수 있게 해준다."
Q. 크리퍼의 디자인을 보면, 강아지 같기도 하고 '옥자' 같기도 하고, 또 '괴물' 같기도 하다. 어떤 고민으로 완성하셨는지 궁금하다.
"그동안 여러 인터뷰에서 '크리퍼' 디자인의 출발이 크루아상 빵이라고 이야기했다. 디자이너에게 처음 준 것이 크루아상 빵이었다. 저는 크루아상 빵을 보면, 되게 움직일 것 같이 생겼다. 겹겹이 레이어가 있어서 아코디언을 쭉 늘려서 펴는 것처럼 벌레처럼 움직일 것 같은 묘한 볼륨감이 있다. 마마 크리퍼가 될수록 점점 더 크루아상 같아진다. '미키 17' 속에 크게 세 가지 크리퍼가 등장한다. 베이비 크리퍼는 귀여움을 담당한다. 움직임도 사실 강아지 동작이다. 강아지의 움직임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다 녹아내린다. 주니어 크리퍼는 액션을 담당한다. 동그랗게 뭉쳐서 굴러가는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마마 크리퍼다. 마마 크리퍼야 말로 4선 의원의 풍모가 있다. (웃음)"
Q.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4관왕이 되신 것도, 글로벌 프로젝트에 이제는 이질감 없이 이름을 올리시는 것도,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감독님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 길 위에서 어떤 목표와 꿈이 있는지 궁금하다.
"영화감독은 결국 영화를 찍는 거라서, 육상 선수가 기록을 경신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지난번 '기생충'으로 예기치 못하게 상을 너무 많이 받아버려서, 그것 때문에 '세계를 제패했다'라는 표현이 되게 민망하다. 그런 표현은 위대한 차범근 선수, 손흥민 선수, BTS(방탄소년단), 블랙핑크 이런 분들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저는 사실 약간 좀 이상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계속 기억되고 싶다. 어떤 환경과 조건에 던져져도 끊임없이 계속 이상한 톤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할리우드에서도 예전에는 제 작업이 신기하고 이상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존중해준다. 지금도 애니메이션 작품을 하나 만들고 있다. 해왔던 것처럼 계속 제 작업은 쭉 이어질 것 같다. 작품이 개봉하기 전, 항상 그다음 작품이 준비되어 있었고, 하고 있었고, 계속해 나가는 것이 제 상황이다. 저의 여덟 번째 영화가 '미키 17'인 거고, 그다음 작품이 애니메이션이다. 이렇게 작업하는 과정을 이어가고 싶다."
Q. '미키 17'의 배경이 2054년이다. 그때 자신의 나이가 85세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의 자신은 어떤 모습일 것 같나.
"85세. 저기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기계 몸을 장착하고 계속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184번째 영화까지 그냥. (웃음)"
Q. 엔데믹 상황에서도 극장에 관객의 발걸음이 뜸해진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영화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미키 17'을 통해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마음이 궁금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고, 저의 직업이기도 하다. '미키 17'의 배우 중 로버트 패틴슨이 가장 먼저 오지 않았나. 그때 같이 용산 IMAX에서 영화의 일부를 틀고 팬과 만나는 행사가 있었다. 거기 극장이 꽉 차 있고, 관객들이 로버트 패틴슨을 향해서 '사랑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커다란 경사면에 가득 찬 관객들이 시네마의 스타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게 됐는데, 그때 마음이 좀 뭉클해지더라. 커다란 스크린 앞에서 새롭게 펼쳐질 두 시간의 스토리를 기다린다는 것. 극장이 가진 원초적인 파괴력을 따라갈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들더라. 제가 이번에는 스튜디오에서 제안한 원작 소설을 받아서 작품을 완성했지만, 다시 한국 감독으로 한국의 배우들과 한국의 관객과 밀착해서 호흡하고 싶은 한국 영화를 찍을 거다. 저는 한국의 극장들이 또다시 다이나믹하게 굴러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Q.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살짝 언급했던 지하철 3호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관련된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많은 시퀀스들이 머릿속에 있다. 어떤 배우와 일을 할지도 대략 정리된 생각이 있다. 하지만 배우들 본인은 모릅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