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아파트' 부르는 장면부터 달라졌다…"제 모습 보며 CG인 줄" [인터뷰]
* 해당 인터뷰에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면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 이가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 속에서 비밀을 간직한 채 입주민 대표의 자리에까지 오른 '영탁'이 그 주인공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40여 편의 영화에서 활약한 이병헌은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어떻게 또 새로울 수가 있지. 배우 이병헌을 보면 느끼게 되는 감정이고, 감탄이다.
이병헌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황궁 아파트 입주민 대표가 되는 영탁 역을 맡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이 벌어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보통 재난물이 재난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비하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들의 고군분투를 담았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췄다.
지구를 압축해 놓은 듯 다양한 인간 군상이 황궁 아파트에 모였다. 그중에서도 택시기사 모세범은 자신의 아파트 매매가를 떼먹은 사기꾼 영탁(박종환)을 잔인하게 살해한 후, 대지진을 마주하고 영탁인 척하며 황궁 아파트의 입주민으로 대표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어디에서도 리더가 되어본 적 없는 인물이에요. 나중에 정체가 드러나면 알겠지만, 이 사람 정신 상태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예요. 바로 누군가를 살인하고, 지진으로 인한 가족의 죽음을 알게 된 것도 며칠 되지 않았고요. 자기 삶마저도 놓아버릴 지경인 사람이 어느 순간 주민 대표가 되고, 갑작스러운 신분의 변화를 느끼게 되잖아요. 부녀회장 금애(김선영)가 '이제 세상이 리셋된 거야. 살인자나 목사나 똑같아'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 잘 안 보였겠지만 영탁의 심경 변화가 많이 생기는 장면이었죠."
"아마 영탁이 처음 등장하는 아파트에 난 불을 끈 모습은 조건 반사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하고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모세범은 영탁을 찾아가기 전부터 그 집은 자기 집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매매 관련해서 돈을 다 냈는데, 아직 집이 없는 거잖아요.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영탁이 살인자 모세범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다. '아파트'를 부르고 있는 영탁이 과거를 회상하고, 모세범이 잔혹하게 영탁을 죽이는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아파트'를 부르고 있는 영탁을 볼 때, 그는 관객에게도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변화를 이병헌은 스크린에 옮겨냈다.
"그 장면에 콘티가 있었어요. 누군가 '대표님 노래 한 곡 부르세요'라는 말에 마지못해 부르는 신나는 노래였는데요. 아저씨 춤추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과거 회상 장면이 나오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얼굴이 크게 보이는 클로즈업 화면에서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담은 콘티였어요. 그 콘티를 보고 '여기에서 변화를 보여주면 맞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려놓은 감정적 변화에 대한 계획을 짜고, 처음부터 끝까지 맞춰갔는데요. 카메라 앵글이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의도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던 장면이 된 것 같아요. 저도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어요."
모세범은 영탁을 살인할 때, 분노와 억울함으로 반쯤 미쳐있는 상태였다. 누워있는 박종환의 멱살을 쥔 이병헌 역시 그랬다. 관객으로 극 중 이병헌의 액션 장면은 많이 봐 왔지만, 그 장면 속 이병헌의 모습은 처음 보는 섬뜩함이었다.
"저도 그 장면을 보고 '나에게 이런 얼굴이 있었나'라고 놀랐어요. 모니터를 보면서 저도 무서웠어요. CG(컴퓨터 그래픽)인가 싶었고요. '왜 이런 눈빛과 얼굴이 나에게 나온 거지'라고 생각하며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기본적으로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행동의 이유를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인물이 가진 복잡 미묘한 상태를 나름대로 추측하게 되거든요. 저는 영탁이 이미 죽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더 이상의 삶은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리더의 위치에 서게 된 거죠. 어느 정도의 책임감도 있고, 고민도 많았겠지만, 굉장히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판단들도 분명 많았다고 생각해요. 점점 커지는 권력을 어느 순간 영탁이 주체하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러면서 점점 광기가 생긴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나름대로 추측을 이어가지만, 불안한 순간을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늘 연기로 대중에게 극찬받는 이병헌 역시 그렇다.
"상상에 의존해서 '그래, 이런 감정일 거야'라고 짐작하며 조심스레 연기를 하지만 '혹시 그게 아니면 어쩌지'라는 불안감도 있고요. 내가 의도한 감정이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어쩌지'라고 확신이 없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도 자신을 믿고, 그 감정이 맞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보여주면, 그게 맞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특히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강한 감정선이 나오는 영화에서 불안감이 큰데요. 다행히 관객의 반응이 좋아서요. 그때 불안감이 자신감으로 바뀌죠. 배우들은 그런 과정의 되풀이인 것 같아요."
"관객에게 제가 생각한 감정이 전달됐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 같아요. 제가 인물의 감정을 생각한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안도감인 거죠. 더불어 제가 생각한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선'이라는 거고요. 제가 너무나 천재적이고 독창적이고 특이한 사람이라 같은 글을 읽었을 때 다른 감정을 느끼고 연기한다면, 관객들이 그걸 보고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아무리 확신을 두고 연기해도 관객에게 보이기 전에 생기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정도까지 했을 때, 관객들이 이해될까, 함께 이 감정을 가져갈 수 있을까,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등 기대감일 수도 있지만, 불안감도 함께하는 것 같아요."
배우로서 이병헌의 행보는 독보적이다. 끊임없이 작품으로 호평을 받아왔고, 그 인물이 되어왔다. 안주하기보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지금의 '이병헌'을 만들었다.
"순수한 것을 잃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이클 만 감독님 등 외국에 연세 지긋한 감독님들 계시잖아요. 심지어 그 연세에 점점 더 멋있고 세련된 작품이 탄생하죠. 그때마다 '저렇게 연세가 많으신데 점점 더 작품에 힘이 생기고, 창의적인 작품이 나올까'라고 되게 감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 같은 순수함이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그것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거죠. 그런 게 없어지는 순간 빛이 사그라드는 느낌이 아닐까요. 저도 그런 걸 잃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의 이병헌을 보며, 앞으로의 이병헌까지 궁금해진다. 무려 40여 편의 영화를 선보인 이 배우는 어디까지 닿게 될까. 여전히 불안하고, 흔들리고, 그러면서 자신감을 다잡는 이병헌의 행보에 기대감이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