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여정, '방자전'·'인간중독'→'히든페이스' "믿어주셨으니, 해내야죠" [인터뷰]
"연출은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고, 배우는 무대를 기다리는 사람이에요. 저도 저를 못 믿는데, 감독님께서 저를 믿고 선택해 주셨을 때는 그 확신을 믿고 들어가거든요. 저도 모르는 어떤 지점을 보셨을 거라 믿으면서요. 세 번이나 김대우 감독님께서 믿어주셨는데, 제가 잘 못해내면, 그건 정말 슬픈 결말이 되잖아요. 믿어주셨으니, 해내야죠."
배우 조여정이 말했다.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으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봤던 그는 여전히 자신을 '무대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역할을 기다리고, 그 역할이 주어졌을 때에는 촬영 기간 동안 오롯이 그 현장에만 몰입한다. 그 시간은 그가 웹 예능에서 밝힌 연애를 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김대우 감독은 그런 조여정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영화 '방자전'(2010)때부터 함께 했다. 당시 조여정은 두 얼굴을 가진 춘향의 모습을 보여줬고, 이후 '인간중독'(2014)에서는 남편 김진평(송승헌)을 장군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가진 아내 숙진 역을 맡았다. 상류층의 색과 욕망이 뒤섞인 얼굴, 그러면서도 조여정은 이를 '악(惡)'으로만 담아내지 않았다. '히든페이스'에서 그가 맡은 수연 역시 그랬다. 약혼자이자 지휘자 성진(송승헌)의 사랑을 가져야 하는 그는 스스로 밀실로 들어가 그를 시험대에 세운다. 그리고 그 밀실에 갇힌 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후배 미주(박지현)과 그의 정사였다.
Q. 동명의 스페인 원작 영화를 기반에 둔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보고 분명 고된 작업임을 실감했을 텐데,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제가 선택할 때 별 영향이 없는 요소였던 것 같아요. 공연도 한 세기에 걸쳐 여러 배우가 한 캐릭터를 선보이기도 하잖아요. '히든 페이스'의 대본만으로도 '대단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수연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원작의 존재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저와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캐릭터를 만나기도 하는데, 수연은 정말 머나먼 인물이었어요. 이 인물의 성장배경부터 형성된 인격, 지니고 있는 특수한 상황 등을 그냥 상상해서 믿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 말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 같아요."
Q. 과거 회상 장면에서 미주와 수연의 관계를 많은 부분 설명해야 했다. 김대우 감독님의 특별한 디렉팅이 있었는지, 어떤 고민으로 임했는지 궁금하다.
"카페에서 미주와 둘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감독님께서 '미주에게 조금 더 집중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정도 집중 말고 완전히 더?'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집중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다시 (박)지현 배우에게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지현 배우가 하는 미주를 느끼다 보니, 수연이를 할 수 있겠더라고요. 밀실 안에 있는 수연이의 모습을 그릴 때는, 제 앞에 있는 배우들에게 제 연기가 다 있는 거예요. 제가 따로 '해야겠다'라고 준비하는 건 그 앞에서 의미가 없더라고요. 이들을 봐야 마음에서 일으켜지는 것들이 나오더라고요. 원래도 현장에서 집중하려고 하지만, 이번 현장은 유독 그랬어요."
Q. 공항 장면도 인상 깊다. 옷차림부터 수연의 모든 단면이 응축된 장면 같았다.
"뱅 헤어스타일은 공항 지문에 쓰여 있었어요. 김대우 감독님께서 시나리오에 써둔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어떻게 수연을 만들어갈 것인가'의 힌트가 되어줬어요. 공항에서 보면 화려한 옷을 입고서도 털털하게 앉아서 약간 남자같이 이야기하잖아요. 저는 수연이 너무 비호감이 될까봐 걱정했어요. 카페에서 대사할 때도 '내가 안 좋아해도, 나를 좋아해야지'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그냥 자기중심적인 거예요. 그러면서 선생님을 찾아가서 본인 입으로 '사람을 버리면 안 되잖아요'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연기했어도 정말 '웃기고 있네' 하면서 보게 되는 거죠. 제가 입은 캐릭터이지만, 완전히 옹호하고 이해해달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Q. 밀실 내부가 정말 쇠로 마감이 되어있었다고 들었다. 수연이 분노에 가득 차서 내리칠 때, 혹시나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되더라.
"유리와 쇠 파이프와 저와의 액션인 거죠. 그래도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멍들고, 타박상은 어쩔 수 없었죠."
Q. 김대우 감독님께서는 인터뷰에서 밀실에서 야위어가는 수연을 표현하기 위해, 방울토마토 세 개만 먹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건 바로잡아야 해요. 제가 방울토마토 세 개만 먹고 그러지 않았어요. 식사를 다 하고, 방울토마토를 세 개 먹는 모습을 보신 걸 거예요. 체력적인데 어떻게 그래요. 식사해야죠. 메뉴를 조심해서 먹긴 하지만, 아예 굶지는 못해요. 현장에서 쓰러지면, 그게 더 프로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찍어야 할 장면이 이렇게 있는데, 배우 때문에 그걸 못 하게 되면 큰일 나죠. 체력을 갖춰야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 보고 오해할까봐 바로 잡아야 합니다. (웃음)"
Q. 극 중에서 엄마와 수연이 함께하는 장면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묘하게 배우 박지영과 비슷한 말투와 아우라를 보여준다.
"엄마랑 똑같죠? 감독님께서도 '일부러 조율하지 않았는데, 두 분이 똑같이 하시더라고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엄마 나오는 장면에서 엄청나게 웃었어요. '뭐야, 내 말투잖아' 하면서요. (박)지영 언니도 영화 보고 수연을 보면서 같은 이유로 엄청나게 웃으셨대요. 그런 걸 보면, 대본에서 풍기는 말투와 뉘앙스가 명확하게 있었나 봐요. 그건 저 혼자 느낀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대본을 보면서 미주가 '참 식물 같다'라고 느꼈거든요.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 속 인물처럼요. 공항 장면이 거의 첫 촬영이었는데, (박)지현 배우가 정말 화분같이 앉아 있는 거예요. '와, 진짜 저렇네?', '너무 신기하다'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육식동물 같고, 미주는 완전히 초식동물에서 더 나아가 식물 같은 느낌인 거죠."
Q. '방자전', '인간 중독'에 이어 '히든페이스'까지 김대우 감독과 작품에서만 세 번째 만남이다. 그러면서도 그 세 작품 속 배우 조여정이 한 번도 '비슷'했던 적도 없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스스로의 성장을 발견한 지점도 있을까.
"겹치지 않고, 새로운 책을 받는다는 건, 제일 큰 복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거만 한 복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잘 해내고 싶고요. 김대우 감독님께서 인터뷰 중 저에 대해 '진화했다'라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그건 정말 기분 좋은 칭찬인데요. 저는 완전히 다른 장르,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캐릭터 속에서 저의 부족한 부분만 계속 마주한 것 같아요. 모든 게 새로운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현장에서 정말 제 코가 석 자였죠.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고민하느라, 예전의 저를 떠올릴 여유도 참 없더라고요."
Q. '인간 중독'에서 부부로 만났던 송승헌과 '히든 페이스'에서는 약혼자로 만났다. 그리고 그 두 작품에서 모두 아픔을 느껴야 했다. 실제 송승헌과의 호흡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인간 중독' 때도 그랬지만, (송승헌) 오빠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해가 돼요. '인간 중독' 때는 '도대체 어떤 남자이길래, 숙진의 인생에서 목표가 될까'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송승헌) 오빠가 제복 입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납득이 돼요. '할 수 있다', '움직일 수 있겠다', '동기가 확실하다' 라고요. 이번에도 (송승헌) 오빠가 머리를 기르고 지휘를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리더라고요. '이건 말이 되게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둘이 새집에 가서 '익숙해져야 해'라고 수연이 성진에게 말하는 장면 있잖아요. 그때가 기억나요. 아래에서 오빠를 올려다보는데 '음, 마음에 들어, 멋져'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주는 파트너였어요. 그 인물로 탁 믿어지게 해주는 파트너였어요. 그래서인지, 창가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제가 참 좋아해요."
Q. 수연과 성진의 케미만큼, 미주 역의 박지현 배우와의 케미도 중요했다.
"사실 제가 수연과 미주의 과거 장면 때문에 '히든 페이스'라는 작품을 더 어려워했거든요. 그런데 (박)지현 배우만 바라보며 했어요. 이 친구가 교복을 입고 서 있는데 예쁘더라고요. '언니가 엄청 좋아'라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리액션만 해도 되더라고요. 제가 (박)지현 배우에게 '고맙다, 멋지다, 대단하다'라고 이야기한 게, 제가 어려워하는 장면을 해결하게 해줬어요. 이 친구 매력에 내내 빠져서 찍은 것 같아요."
Q. 최근 '히든 페이스' 개봉을 앞두고, 성시경의 웹 예능 '만날 텐데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술을 마시게 됐다고 고백했는데, 이유나 계기가 있었을까.
"집안이 술이 약해서 안 먹고 살다가 어떻게 한 잔 맛을 봤는데요. 맛이 있더라고요. 단지 그거뿐이에요. (웃음) 예능은 어렵죠. 배우들이 아마 다 똑같을 거예요. 역할을 주면 창피할 게 없는데, 저로 나가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실수할까봐 걱정도 되고요. 아직도 나를 드러내는 게 겁이 나는 것 같아요."
Q. 1년에 한 작품 이상씩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너무 좋아요. 재작년부터 연이어 찍어놓은 작품들이 개봉하게 될 거예요. 너무 행복하네요. 그렇다고 일만 하지는 않아요. 중간중간 잘 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좋은 작품을 보면, '나도 부지런히 일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또 더 나아지고 싶고요. 아마 '연기가 나아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제 원동력인 것 같아요.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