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람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고속도로 가족'
차가 고속도로 위를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한다. 그 바로 옆에서 한 가족이 아주 천천히 걸어간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이 가족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산다. 텐트에서 자고, 화장실에서 씻고, 휴게소에 들르는 사람들에게 "2만원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해 얻은 돈으로 음식을 먹으며 살아간다. 이 '고속도로 가족'의 구성원을 말하자면 아빠 기우(정일우), 엄마 지숙(김슬기), 첫째딸 은이(서이수), 막내아들 택이(박다온)이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영선(라미란)은 휴게소 화장실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은이를 보고 "그 물 마시면 안돼"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나오면서 기우를 만난다. 기우에게는 2만원을, 은이에게는 5만원을 건네었다. 기우네 가족에게는 운수 좋은 날이다. 컵라면을 먹거나 메뉴 하나만 시켜 넷이서 나누어 먹었는데, 오늘은 메뉴를 네개도 넘게 시켰다. 그리고 다른 휴게소에서 영선은 '고속도로 가족'을 다시 마주한다. 아이들이 어려움에 처한 건 아닌지 염려되는 영선은 경찰에 신고한다. '고속도로 가족'은 그렇게 다른 길에 들어선다.
'고속도로 가족'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살아가던 가족이 땅에 발붙이며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중력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것은 온기다. 어른들에게는 모두 결핍이 있다. 기우는 한 사건으로 밑바닥으로 내몰리며 정신질환까지 얻었다. 지숙은 보육원에서 자라 삶의 모든 것이 기우뿐이었는데, 그 기둥이 무너졌다. 영선은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이들의 텅 빈 가슴을 채워주는 것은 결국 '사랑'이고, '사람의 온기'다. 영화 '고속도로 가족'은 살아가면서 불안함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다양한 이유로 살아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는 모든 이들에게 그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
각자의 결핍이 있지만, '고속도로 가족'의 가장 큰 미덕은 '불행을 전시하지 않는 태도'다. 쌩쌩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등지고 걸어가는 가족은 불행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누군가 와서 잠자는 텐트를 부술까 매일이 걱정이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배고프다 생각하면 배가 고픈 거고, 안 고프다 생각하면 안 고파"라고 서로에게 말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렇기에 경찰서에 간 기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지숙에게 다시 돌아와 내민 영선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다. 그 손에는 내일을 살아갈 힘이 어떤 길이고 걸어갈 힘이 담겨있다.
'고속도로 가족'을 보면서 가장 크게 놀란 지점은 배우들의 새로운 얼굴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고속도로 가족'이 처음 공개됐을 때, "연기 미쳤다"라고 한 관객의 리뷰에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다. 누구 한 명 비슷한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라미란은 영화 '정직한 후보'나 '치타 여사'('응답하라 1988') 등으로 대표되는 억척스러운 코믹연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살짝 굽은 등으로 삶의 무게를 담았다. 특히 경찰서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가다 돌아서서 지숙에게 손을 내미는 영선이 묵직하게 이어지는 롱테이크(컷없이 이어지는 장면)는 라미란의 연기 내공을 느껴지게 한다.
정일우는 2006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데뷔한 이후, 가장 충격적인 변신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진한 부성애 연기부터 정신질환으로 인한 발작, 욕설 등 커다란 진폭의 감정을 '배우 정일우'의 힘으로 스크린에 실었다. 그를 따라가는 핸드헬드(트라이포드 없이 사람이 카메라를 잡고 촬영하는 방식) 카메라는 그의 불안한 심리를 더욱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계속 내달리고, 자신을 덮기 위해 진흙을 얼굴에 바르는 등 정일우가 보여주는 파격적인 연기는 '고속도로 가족'을 본 후에도 뇌리에 잔상으로 가득 남아있다.
김슬기는 'SNL 코리아' 등에서 보여줬던 말맛을 지웠다. 그의 표현처럼 지숙은 "굉장히 과묵한 역"이었다. 김슬기는 표현을 지우고 영화에 존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했지만, 그렇게 말과 표정을 지운 존재감은 기우에 대한 사랑,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더욱 진하게 스크린으로 전해지게 한다. 특히 "현장에서 아이들 존재 자체로 편하게 해주는 것이 아이들이 가장 훌륭한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라는 김슬기의 사려 깊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택이가 잠들기 전 "엄마"라고 부르며 자연스럽게 뽀뽀하는 장면은 현장에서 김슬기가 어떻게 임했는지를 대변하는 듯 하다.
'고속도로 가족'은 예술 영화라는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불행을 전시하는 괴로운 작품도 아니다. 그 속에 임하는 배우들 역시 '연기'보다는 '존재'하며 흘러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상문 감독은 백 명의 관객이 모두 달리 느낄 수 있는 백 가지 질문을 전한다. '고속도로 가족'의 삶에 대해서, 영선이 잡은 손에 대해서, 사람이 전할 수 있는 온기에 대해서 말이다. 오는 11월 2일 개봉. 러닝타임 12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