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25년 전 살인을 멈추고 딸 은희를 키우는 것에 전념하며 살아온 김병수는 어느 날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게 되고, 그가 진단을 받을 즈음 공교롭게도 동네에는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 자신이 다시 살인을 시작한 게 아닐까 의심하던 김병수는 곧 자신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사랑하는 딸 은희에게 접근하는 수상한 남자가 바로 그 살인범임을 알아챈다. 딸을 지키기 위해 남자를 죽이기로 결심한 김병수. 점점 잊혀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그는 살인범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메모를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해 마지막 살인을 준비한다. 과연 이 늙은 살인자는 기억과의 사투에서 승리해 살인에 성공해 딸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눈길을 사로잡는 ‘살인자의 기억법’은 이 시대의 작가로 손꼽히는 유쾌한 이야기꾼 김영하의 소설이다. 작가 특유의 냉소적인 농담과 간결한 문체가 돋보이는 소설은 정교하고 치밀하다. 소설은 김병수가 남긴 짧은 메모 형식의 독백으로만 진행되지만 기막힌 몰입감을 선사한다.
신선한 소재와 탄탄한 구성, 예측 못 한 반전으로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은 소설은 2017년 동명의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제작되었다. 누적 관객 수 265만 명을 가뿐히 넘기며 흥행에 성공한 영화 역시 많은 이들에게 호평받았다.
영화는 소설의 기본적인 얼개와 반전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지만, 원작 소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오롯이 김병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3인칭 시점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기에 소설에 없는 다양한 인물과 에피소드를 대거 추가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화는 소설과 다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고, 소설보다 훨씬 다채롭고 풍성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물론 김병수의 살인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추가한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이라던가 젊은 살인범 민태주의 광기를 설명하기 위한 두개골이 함몰된 괴기스러운 외모 등의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 아쉽기도 하지만, 소설과는 다른 자신만의 매력을 완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나름 만족스럽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늙은 살인자만큼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반전으로 인해 삶과 죽음, 시간과 악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소설은 꼭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쾌속 질주하는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영화를 본다면 훨씬 다양한 재미를 느끼며 작품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