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베네통] (2) 작은 캔버스 타고 세계 여행 다니는 현대미술관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온 캔버스가 점차 쌓이면서 루치아노 베네통은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화시키고 싶었고, 보다 많은 이들이 ‘다문화적 컬렉션’을 접할 수 있도록 2013년 베니스의 폰다치오네 조르조 치니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동안 축적돼온 다채로운 컬렉션의 일부를 한 공간에서 대중에게 선보인 것이다.
이후 그는 이처럼 이마고 문디 컬렉션을 세계 각지에서 전시회를 통해 소개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확대해나갔다(뉴욕, 비엔나, 세네갈 등에서 지금까지 10차례 전시가 열렸다).
‘순회전’처럼 컬렉션이 일종의 여행을 하는 콘셉트인데, 전시 장소에 따라 컬렉션의 조합이 달라진다. 예컨대 최근 21개 컬렉션이 중국으로 2년 일정의 장기 여행을 떠났는데, 이 대형 전시는 앙골라, 카메룬,칠레, 인도, 러시아 등의 다채로운 컬렉션으로 구성돼 있다.
이미 1백50여 개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인 만큼 이마고 문디 컬렉션은 세계지도를 펼쳐놓아야 한눈에 들어온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대륙별로도 골고루 분포돼 있는 편이라 부루마블 게임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런 만큼 이 중 한국 컬렉션(South Korea Collection)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지만(어떤 이마고 문디 전시도 한국에서 열린적은 없다), 북한 컬렉션(North Korea Collection)이 존재한다는 점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북한과의 협업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노동당 직속 미술 창작 단체인 만수대 창작사를 통해 이뤄졌다. 북한 컬렉션은 마침 중국행 전시 여행에 동참하는 바람에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인터넷 사이트(imagomundiart.com)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루치아노 베네통은 북한 도록을 펼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만수대 아티스트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자수(embroidery) 작품을 소개했다. 호랑이, 사자 등 각종 동물을 섬세한 자수로 담아낸 ‘세계지도(World Map)’라는 작품인데, 80여 명의 아티스트가 3개월에 걸쳐 만들어낸 대형 지도(185X300cm)라 소형 캔버스의 원칙을 깬 채 실물 규모로 전시되고 있다. 북한 아티스트들의 자수 지도를 프린트까지 해서 보여주면서 놀라운 솜씨라고 칭찬하던 그는 지금 만수대와 또 하나의 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베니스와 중국을 왕복한 마르코 폴로의 여정을 자수 지도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란다. 작품명은 ‘실크 로드(Silk Road).’
어떤 경계나 제약도 초월할 수 있는 예술의 힘
실크 로드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즐거워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이런 게 바로 예술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마침 그도 비슷한 말을 했다. “종교나 정치 등 세상에는 여러 복잡하고 어려운 이슈가 있지만, 아티스트들은 그런 틀에 갇히지 않고도 작업을 해나가고 소통할 수 있어요. 저도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정말 배운 게 많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출장이나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잘 몰랐던 지구 곳곳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채로운 문화와 아티스트를 접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거든요. 아주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작업을 해나가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지요.” 그는 그런 맥락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작가들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아트 컬렉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됐지만 글로벌 아트 프로젝트에서는 겸허함을 느끼게 된다는 그는 사실 맹렬하게 비즈니스 전장에서 활약했을 때도 누구 못지않게 글로벌 이슈에 관심이 많았다. 패션 기업인데도 워낙 인종이나 성 평등, 기아, 자유 등 다양한 국제적 이슈를 부각했던지라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베네통이 왠지 미국 기업인 줄 알았던 적도 있다고 하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적하고 멋스러운 도시지만, 보수적일 수도 있는 고향 트레비소에서 유복하게 성장한 유럽인인 루치아노 베네통이 ‘세상의 다양성’에 그토록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자는 사회·문화·정치적인 메시지를 파격적으로 전달하는 베네통 특유의 광고를 영리한 비즈니스 감각으로 폄하하기도 했지만, 이처럼 은퇴한 뒤에도 지구촌의 비주류 커뮤니티에 순수한 호의와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그의 진정성을 마냥 의심하기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그 최초의 계기는 다름 아닌 ‘올림픽’이었단다. “20대 중반의 청년이었을 때, 1960년에 열린 로마올림픽을 구경하러 갔다가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게 많은 나라에서 피부색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현장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게 시작이었을 겁니다.”
오랜 세월 아트 컬렉터이기도 했기에 순수한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또다시 글로벌 규모의 현대미술 프로젝트라는 큰 판을 펼치게 된 루치아노 베네통. 개인적인 시간과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오히려 이마고 문디를 통해 한 뼘 더 성장한 것 같다는 그의 눈에는 생기가 넘쳐흘렸다. 문화적 차이를 수용하면서 재능 있는 무명·신진 작가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그는 글로벌 미술 매체인 <아트넷(Artnet)>에서 선정한 혁신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은퇴한 기업인의 성공적인 전형을 보는 듯해 흐뭇하긴 했는데, 빠른 속도로 커져가는 컬렉션이 살짝 걱정이 됐다. 현재 이마고 문디 팀은 베네통 파브리카 공간이 자리한 건물에 ‘신세’를 지고 있다. 아무리 여행을 많이 떠난다 해도 상당한 컬렉션이 한곳에 머물러야 하고, 각종 자료도 불어나고 있기 때문에 ‘공간’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을 터. 당연하지만 그도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트레비소 시내에 있는 두오모 광장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감옥이기도 했던 유서 깊은 건물이 있는데, 그곳으로 이사를 갈 예정입니다. 이마고 문디 팀과 컬렉션이 통째로 옮겨 가게 되는 셈이죠.” 트레비소에 뿌리를 둔 베네통 가문은 이 도시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데 오랫동안 기여해왔는데, 그 유산 중 하나가 이마고 문디의 본부가 되는셈이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하면서 가만히 이 말을 통역하던 팀원들은 자신들도 '처음 접하는 소식'이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특종'을 선사한 게 아니겠냐며. 작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원대한 이 뜻깊은 아트 프로젝트의 행보가 어떤 울림을 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