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케 전설 품은 계곡…도쿠시마 이야·오보케 비경 여행
약 800년 전, 전쟁에서 패한 헤이케(平家) 일족은 추격을 피해 도쿠시마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이 택한 곳이 지금의 이야계곡(祖谷渓)이다.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계곡 바닥까지 수백 미터에 이르는 이 땅은, 숨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그 흔적은 지금도 이야계곡 곳곳에 남아 있다. 덩굴로 엮은 다리, 폭포 아래 비파 소리의 전설까지. 도쿠시마 서부를 여행한다는 것은 그 오래된 이야기 속을 걷는 것에 가깝다.
헤이케는 12세기 일본을 지배했던 무사 가문으로,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겐지(源氏)에게 패한 뒤 일부 일족이 추격을 피해 각지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고 전해진다. 이야계곡은 지금도 헤이케 패잔병들의 은신처로 전해지는 대표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다.
이야계곡으로 가는 길, 히노지 전망대
이야계곡으로 향하는 길에 히노지 전망대(ひの字渓谷展望台)에 들러볼 만하다. 쓰루기산에서 발원한 이야강이 시코쿠 산지를 깊게 파고들며 만들어낸 협곡으로, 강의 흐름이 일본 히라가나 ‘ひ(히)’ 자 모양으로 굽이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약 20km에 걸쳐 이어지는 대협곡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계곡 아래로 이어지는 깊은 협곡 풍경은 헤이케 일족이 이곳을 은신처로 삼았다는 전설과도 맞닿아 있다.
덩굴로 엮은 다리, 이야 카즈라바시
이야계곡의 대표 관광지는 카즈라바시(かずら橋)다. 산에서 채취한 덩굴식물 시라쿠치카즈라(シラクチカズラ)로 엮은 현수교로, 일본 3대 기교(奇橋)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길이 약 45m, 폭 약 2m, 수면에서 높이 약 14m에 이른다. 헤이케 패잔병들이 추격자가 오면 바로 끊어버릴 수 있도록 덩굴로 엮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리 위에 올라서면 발판 사이로 에메랄드빛 계곡물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고소공포증을 느끼는 방문객도 적지 않다. 어린아이는 발판 간격이 넓어 통행이 어려울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카즈라바시는 안전을 위해 일방통행으로 운영된다(성인 기준 550엔).
카즈라바시 인근에는 비와 폭포(琵琶の滝)도 있다. 헤이케 패잔병들이 이 폭포 아래에서 비파를 연주하며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화려하지 않은 작은 폭포지만, 그 사연을 알고 보면 풍경이 다르게 다가온다.
절벽 끝에 남은 이야기, 오줌싸개 동상
도쿠시마 서부에는 헤이케 전설이 깃든 장소들 외에도 협곡과 절벽, 독특한 지형이 이어지는 비경이 곳곳에 남아 있다.
카즈라바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이야계곡의 또 다른 명물이 있다. 절벽 끝 바위 위에 세워진 오줌싸개 동상(小便小僧)이다.
이야계곡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남겨진 바위 위에 세워진 동상으로, 과거에는 지역 아이들이 이곳에 올라 담력을 겨루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작은 동상이 절벽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발 아래로는 아득한 절벽과 이야강이 펼쳐지고, 바위 아래에는 방문객들이 던진 동전이 가득하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야계곡 특유의 아찔한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오보케·코보케, 협곡 따라 이어지는 절경
이야계곡에서 오보케(大歩危) 방향으로 내려오면 풍경이 또 한 번 달라진다. 요시노강(吉野川)이 만들어낸 오보케 협곡은 일본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로, 회색 암벽과 에메랄드빛 강물이 어우러진 장관을 이룬다.
유람선을 타고 협곡 안으로 들어가는 코스가 대표적이다(성인 기준 1,500엔). 약 30분간 이어지는 뱃길에서 양쪽으로 솟아오른 거대한 암벽과 협곡 풍경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다.
유람선 선착장 인근에는 도쿠시마 대표 특산물인 고구마를 활용한 먹거리도 판매한다. 도쿠시마산 고구마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유람선 탑승 전후로 가볍게 즐기기 좋은 간식이다.
인근 코보케(小歩危) 전망대에서는 협곡 사이를 흐르는 요시노강과 굽이치는 산세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협곡과 강물이 만들어내는 풍경 덕분에 사진 촬영 명소로도 꼽힌다.
시간이 빚어낸 풍경, 아와의 토주
아와의 토주(阿波の土柱)는 약 100만 년에 걸쳐 비와 바람이 흙과 자갈층을 침식해 만들어낸 기둥 형태의 지형이다. 1934년 일본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현지 관광 안내에서는 미국 로키산맥, 이탈리아 티롤 지방과 함께 ‘세계 3대 토주’ 가운데 하나로 소개한다.
규모 자체는 크지 않지만 가장 높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현장에는 약 100년 전부터 현재까지 모습을 비교한 연도별 사진도 전시돼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토주의 형태가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비가 올 때마다 조금씩 침식되며 모습을 바꿔 가는 살아있는 자연이다. 다국어 오디오 가이드(QR코드)도 제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