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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리포트]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이제는 안심을 설계할 때

기사입력 2025.06.27 06:00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말의 덫을 넘어
  • “노후에 병이라도 나면 가족까지 무너집니다.” TV, 지하철, 유튜브 광고에서 자주 마주치는 문구다. 질병이나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오고, 대비하지 않으면 삶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뉴스 헤드라인, 금융 상품, 디지털 헬스 광고, 유튜브 콘텐츠에서도 위기와 불안을 자극하는 문장이 반복된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불안을 개인의 심리 문제로 여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불안은 감정 이전에 구조의 결과다. 공공 돌봄 체계, 의료 안전망, 지역 기반 복지가 충분히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위험을 감내하는 책임이 자연스럽게 개인에게 전가된다. 그렇게 불안은 시스템이 아닌 개인이 감당해야 할 감정으로 전환된다.

  • 사회의 무관심과 제도의 빈틈은 개인을 불안의 한가운데로 몰아넣는다.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 사회의 무관심과 제도의 빈틈은 개인을 불안의 한가운데로 몰아넣는다.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한국의 GDP 대비 경상 의료비 지출은 2021년 기준 8.4%로, 당시 OECD 평균인 9.7%보다 낮았다. 그러나 이후 의료비 지출이 빠르게 늘면서, 2022년에는 GDP 대비 9.7%를 기록해 처음으로 OECD 평균을 넘어섰다. 특히 2014년 6.5%였던 한국의 의료비 지출 비율은 2019년에는 8.0%로 뛰었으며, 이 증가 속도는 같은 기간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수준이었다. (OECD Health at a Glance 2023)

    이런 급속한 의료비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의 부담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공공 의료비 지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공 의료비 지출은 전체 의료비의 약 59%로, OECD 평균 73%에 크게 못 미친다. 개인이 부담해야 할 의료비의 몫이 클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은 커진다. 실제로 한국의 가계 의료비 부담률은 OECD 평균의 1.5배에 달한다.

    “불안은 공백에서 자란다”는 말처럼, 지금의 불안은 공공의 빈틈에서 시작된 문제다. 만약 ‘노후에 병이 나도 회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존재했다면, 우리는 보험 상품에 불안을 위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은 개인이 만든 감정이 아니라, 국가가 감당하지 못한 구조의 빈자리가 만들어낸 그림자다.

    이러한 불안의 틈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에이지테크 기술이 등장했다. AI 기반 건강관리, 스마트 요양, 디지털 치료제 등은 분명 유용한 기술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조차 “놓치면 늦는다”, “당신의 부모님이 위험할 수 있다”는 식의 메시지로 불안을 자극하는 마케팅 수단이 되고 있다. 기술 자체는 선한 의도로 개발되었지만, 그것을 소개하는 방식이 문제의 일부가 되고 있다.

    물론, 개인의 준비가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사회란 개인의 노력과 사회적 기반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균형이 지나치게 ‘개인 부담’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높은 세율(덴마크의 소득세 최고세율 55.9%)을 감수하는 대신 포괄적인 사회보장 시스템을 구축했다. 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소득세 최고세율 45%)을 유지하면서도 개인이 더 많은 위험을 감당하도록 하는 구조를 택했다.

    덴마크의 사례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덴마크는 GDP 대비 건강 분야에 약 10.8%를 지출하며(OECD Health at a Glance 2023), 전체 보건 예산의 약 4.1%가 병원 기반 정신건강 서비스에 사용된다(ReportLinker, 2024). 디지털 치료 플랫폼과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도 공공 의료 체계에 통합돼 운영된다.

    대표적으로 ‘인터넷 인지행동치료 프로그램(Internetpsykiatrien)’, 청소년 정서 지원 포털 ‘Mindhelper’, 그리고 국립 디지털정신의학센터(Center for Digital Psychiatry) 주도의 다양한 온라인 상담·치료 서비스가 국가 차원에서 제공된다. 이처럼 덴마크는 디지털 기술을 심리 지원의 단절을 줄이는 공공 인프라로 적극 활용하며, ‘불안’을 개인이 감내해야 할 감정이 아닌 사회가 함께 다뤄야 할 공공 과제로 규정하고 있다. 시민들은 ‘아플 권리’, ‘회복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받는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현실적 대안으로는 국민건강보험의 보장률을 높이고, 중증질환에 대한 본인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장률을 현재 65% 수준에서 75%로 확대할 경우 건강보험료 인상(월평균 1만 원내외)이 불가피하지만, 이는 개인이 민간 보험에 지출하는 비용보다 훨씬 효율적인 선택일 수 있다.

    또한 읍면동 단위로 ‘지역 돌봄 거점’을 설치하고, 보건소·의료기관·복지센터를 연계한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기존 사회서비스원과 연계해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다. 공공 의료 확대는 대기시간 증가나 의료 인력 부족 같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또 2030년까지 65세 이상 인구가 25%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지속 가능한 재정 확보 역시 중요한 과제다. 덴마크식 모델을 그대로 도입하기엔 높은 세율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다.

  • 돌봄의 연결고리가 촘촘할수록, 개인은 더 적은 불안을 감내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 돌봄의 연결고리가 촘촘할수록, 개인은 더 적은 불안을 감내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현재의 ‘불안 경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개인이 모든 위험을 감당하도록 하는 구조는 결국 사회 전체의 불안정을 가중한다. 기술은 신뢰라는 기반 위에서 비로소 제 기능을 한다. 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설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정교한 기술도 불안을 온전히 해소할 수 없다.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이 진정 도움이 되려면, 그것이 불안을 조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안심을 제공하는 인프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AI 건강관리 앱이 ‘위험 신호 감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일상의 건강한 리듬 유지’를 돕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마케팅도 “준비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가 아니라 “함께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로 바뀔 필요가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보험 상품이 아니라, 더 튼튼한 공공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뒷받침할 사회적 합의다. “누구든 병들 수 있고, 회복될 수 있으며,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 위에서 새로운 사회적 계약이 설계되어야 한다.

    불안을 파는 사회를 넘어서야 한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사회는 여전히 불안에 기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더 많은 ‘대비’가 아니라, 모두가 안심하고 나이 들 수 있는 사회다. 신뢰를 기반으로 설계된 사회야말로, 우리가 함께 그려야 할 미래다. 그 첫걸음은 불안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