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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 4차 한류 붐이 한창인 지금, 한류는 단순한 인기를 넘어 일본의 주류 문화로 스며들고 있다. 기존 한류 열풍이 드라마를 애청하는 중장년 여성층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4차 한류는 한국 영상 콘텐츠, K팝을 넘어 식음료, 게임, 만화 등 그 폭이 넓어졌다.
4차 한류가 Z세대를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한류 팬층은 젊어지고, 세대는 다양해졌다. 최근 일본어 자판 앱 '시메지'가 10~24세 일본인 이용자 2천 3백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이 미국을 제치고 '유학 가고 싶은 나라' 1위에 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토픽(TOPIK, 한국어능력시험)을 주관하는 한국교육재단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토픽 시험 응시자가 4만 1천 명을 넘겼다. 이는 토픽 시험이 처음 치러진 1997년과 비교해 26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특히 2020년 이후 수험자가 급증한 것으로 보아,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한류 열풍기임을 실감케 한다.
한국과 일본의 콘텐츠가 융화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기존 한류가 단순히 한국 콘텐츠를 소비하는 형태였다면, 이제는 분야를 막론하고 한일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 한일 합작부터 기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경우까지, 양국 사이에 흐르는 콘텐츠 산업 현황을 살펴본다.
◆ 한류 이끈 드라마·영화, 활발해지는 콘텐츠 생산자 간 협업 -
지금 일본은 '횹사마' 열풍이다. 일본에서 인기리에 종영한 TBS 드라마 '아이 러브 유(Eye Love You)'에 출연한 한국 배우 채종협이 현지서 인기몰이하고 있다. 일본 지상파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드라마에서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은 건 채종협이 최초다.
한국 배우가 일본 작품에 출연한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다. 이미 김태희, 배두나를 비롯해 현지에서 탄탄한 팬층을 거느린 가수 겸 배우 김재중, 강지영도 일본 드라마에 출연한 바 있다. 최근엔 배우 안보현이 일본 숏드라마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곳'에 출연, 엔플라잉 김재현도 '너와 세계가 끝나는 날에'에서 열연했다. 2017년 일본에 진출한 심은경은 일본 영화 2편으로 일본 아카데미 등 현지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
덕분에 일본 영화, 드라마 내에서 한국 배우들의 입지가 넓어지고 있다. 다음 타자로 한효주와 황찬성, 하연수 등이 한국 배우 열풍을 이어갈 예정이다. 하연수는 일본 스타 배우들이 거쳐 간 일본 공영방송 NHK 아침 연속극 신작 '호랑이에게 날개(虎に翼, 토라니츠바사)'에서 주연급으로 극을 이끌고 있다. 황찬성 역시 지난달 방영을 시작한 후지TV TWO '순다방인연(純喫茶イニョン, 준킷사인연)'으로 첫 일본 드라마를 선보였다.
한효주는 일본 넷플릭스 시리즈 '로맨틱 어나니머스' 출연을 확정, 촬영에 돌입했다. 한효주는 일본 유명 배우 오구리 슌과 로맨스 호흡을 맞춰 한일 로맨스 흥행을 이어갈 전망이다. -
한국 배우의 일본 진출뿐 아니라 일본 배우와 감독의 한국 진출도 많아졌다. 2022년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 '브로커'를 통해 한국 극장가를 두드렸다. '브로커'는 그해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 주인공 송강호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글로벌 OTT 서비스 디즈니+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을 필두로 한 한국 웹툰 원작 드라마 '커넥트'로 국내외 시청자에게 호평받았다. 최근엔 일본의 거장 감독 유키사다 이사오가 드라마 '완벽한 가족'을 통해 한국 드라마 연출에 도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국내 팬층을 다진 일본 대세 청춘 배우 사카구치 켄타로는 한국 작품에 도전한다. 쿠팡플레이 시리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통해 이세영과 로맨스 케미를 보여줄 예정이다.
◆ 솔솔 불어오는 J-pop 붐…韓 공연장 채우는 日 가수들 -
세계 두 번째 규모인 일본 음악시장, 그 중심에 있는 오리콘 차트에선 K팝 가수의 노래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미 차트를 석권한 한국 아티스트도 여럿이다. 현지 인기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준은 투어 규모다. 약 5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일본 최대 규모 도쿄돔 공연은 현지 진출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로 통한다. 현지서도 최상급 아티스트만이 채울 수 있다는 도쿄돔에 K팝이 울려 퍼지고 있다.
한국 가수의 첫 도쿄돔 단독 공연은 2007년 비가 이뤄냈다. 이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카라, 소녀시대, 빅뱅, 샤이니,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세븐틴, 블랙핑크 등이 도쿄돔 단독 공연을 펼쳤다. 최근에는 K팝 가수의 도쿄돔 입성이 빨라지는 추세다. 데뷔 2~3년 차 K팝 아이돌이 도쿄돔 단독 콘서트를 여는가 하면, 아예 데뷔 무대를 한 신인 그룹도 있다. 4세대 대표 걸그룹 에스파는 데뷔 2년 9개월 만인 지난해 8월 도쿄돔 단독 콘서트를 개최, 오는 8월 재입성을 앞두고 있다. 6월엔 뉴진스가 팬 미팅을 열고 9월에는 아이브가 월드투어 앙코르 공연으로 첫 도쿄돔 무대를 꾸민다. 특히 데뷔 1년 11개월 만에 도쿄돔 단독 공연을 펼칠 뉴진스는 '해외 아티스트 최단기간 도쿄돔 입성'이라는 기록을 쓰게 됐다. -
이처럼 K팝 가수들이 일본 현지에서 유수 성적을 거두는 것에 반해, 그동안 일본 음악은 국내 주류 음악으로 사랑받지는 못했다. 일본 밴드나 애니메이션 음악이 서브컬처와 함께 팬층을 쌓는 정도였다. 이 분위기는 근 몇 년 사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일본 음악이 인기를 끌면서 팬덤이 커져갔다. 일본 남성 솔로 가수 이마세는 'Night Dancer(나이트 댄서)'로 한국서 챌린지 열풍에 이어 J팝 최초로 국내 음원 사이트 멜론 톱100에 진입하기도 했다. 최근엔 내한 쇼케이스도 성료, 오는 7월 개최하는 아시아 투어 포문을 서울에서 연다. 비슷한 시기엔 독특한 음색의 요아소비가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 OST '아이돌'로, 아이묭은 '사랑을 전하고 싶다던가'로 한국 리스너들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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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는 일본 가수의 내한 공연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해 첫 내한 콘서트를 연 요아소비는 '최근 10년 동안 국내에서 1만여 명 규모의 공연장을 채운 유일한 일본 가수'라는 타이틀을 썼다. 이어 유명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극장판 '원피스 필름레드' OST '신시대'로 유명한 아도가 지난 2월 첫 내한 공연을 펼쳤고, 4월엔 대세 일본 밴드 킹누가 한국 공연을 성료했다.
오는 7월에는 '귀멸의 칼날' TVA와 극장판 OST를 부른 가수 리사(LiSA)가 한국을 찾는다. 리사의 내한 공연은 티켓오픈 3분 만에 전석 매진되면서 인기를 실감케 했다. 이외에도 일본 싱어송라이터 이브, 밴드 스파이에어, 래드윔프스, 즛토마요, 그룹 아타라시이 각코가 올해 국내 관객을 만나고, 에일과 스즈키 코노미는 2년 연속 내한하며 한국 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재패니메이션 한복판 향한 韓 슈퍼 IP -
'재패니메이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애니메이션은 일본 주요 산업 중 하나로 꼽힌다. 시장 규모만 약 24조인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에 한국 웹툰과 웹소설이 진출을 시작했다. 탄탄한 세계관과 캐릭터성을 가진 한국의 슈퍼 IP(지식재산권)에 일본 기술력이 더해진 모양새다.
유명 한국 웹툰 '신의탑', '갓오브하이스쿨', '노블레스',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 등이 이미 현지 제작사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했다. 간간히 이뤄지던 한국 웹툰, 웹소설의 애니메이션화가 최근 들어 활발히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K-웹소설 원작의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이 현지서 전파를 탔고, 올해에는 글로벌 143억 조회수를 넘긴 카카오엔터의 대표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이하 '나혼렙')이 1분기 신작 애니메이션으로 공개됐다. 넷플릭스에 동시 공개된 '나혼렙'은 1기 방영 종료와 함께 2기 제작까지 확정하며 인기를 입증했다. 특히 일본 애니 음악의 대가로 불리는 사와노 히로유키가 OST에 참여, 현지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K팝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가 가창해 음악적 협업까지 이뤘다. -
'나혼렙'을 시작으로 동명의 K-웹소설·웹툰을 원작으로 한 TV애니메이션 '외과의사 엘리제'가 1분기에 공개됐고, 박태준 작가의 '싸움 독학'은 2분기 현지 방영을 시작했다. '신의 탑' 2기는 올 3분기 신작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며 4년여 만에 새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 웹툰, 웹소설뿐만 아니라 한국 게임도 미디어믹스를 통해 IP 확장에 나서고 있다. 넥슨의 인기 모바일 게임 '블루 아카이브'는 최근 TV 애니메이션 '블루 아카이브 더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했다. 게임 세계관 속 메인 스토리 '대책위원회 편'을 각색, 원작 캐릭터를 그대로 살려내 담았다. 애니메이션 방영 후 원작 게임 매출 순위도 소폭 상승하며 긍정 효과를 보고 있다.
더 이상 한류 열풍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의 협업으로 콘텐츠 생태계가 넓어지고 있는바, 양국 교류로 탄생할 다양한 콘텐츠에 기대가 쏠린다.
- 이우정 기자 lwjjane864@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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