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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문진승을 영화 '만분의 일초' 시사회에서 마주했을 때, 그의 헤어스타일은 짧지 않았다. 하지만 약 일주일 후, 인터뷰 현장에서 그는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로 등장했다. 헤어스타일을 바꾼 이유를 묻는 말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직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군인 캐릭터의 연기를 준비하고 있어서요"라고. 확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그 캐릭터에 가장 최선을 다해서 임하기 위해 헤어스타일을 바꿨다. '배우 문진승'의 진심과 간절함이 전해지기에 충분한 한마디였다.
소리치고, 울고, 주먹을 날리는 연기도 물론 어렵다. 하지만 소리를 머금고 과거를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을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어려운 작업이다. 영화 '만분의 일초' 속 문진승이 맡은 태수는 후자다. 자신이 과거에 벌인 비극을 검을 내려치는 훈련의 과정을 통해 비워내는 인물이다. 문진승은 태수를 그려낸 것에 대해 "비워내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
'만분의 일초'는 국가 대표 최종 선발 라인업에 오른 재우(주종혁)가 일인자의 자리에 있는 태수(문진승)에게 겨누게 되는 검 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씻을 수 없는 과거를 수련으로 계속 비워내는 태수와 그의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재우의 심리가 영화가 진행되는 100여 분의 시간 동안 빼곡하게 채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촘촘한 기록은 손에 잡힐 듯하다.
문진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촘촘함을 "도복을 입고, 벗고, 두건을 쓰고, 벗고"의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 갔다. 문진승은 평소 캐릭터에 다가가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아간다. 인물이 좋아할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을 정해서 들어보기도 하고, 전사를 글로 적어보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 인물은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껴보려고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그 인물이 자신에게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려고 한다. 태수의 길은 '반복'과 '비워냄'에 있었다. -
"제 첫 주연작이었고, 동시에 '검도'라는 소재의 첫 작품이었잖아요. 심지어 태수는 그 속에서 일인자예요. 자칫하면 보일 수 있는 제 어색하고 미숙한 동작에 이 영화가 힘을 잃을 수 있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이 있었어요. 평소 캐릭터에 임할 때 굉장히 집중해서 노력하는 편인데요. '만분의 일초'에서는 기본적인 걸 반복하려고 했어요. 하면 할수록 검을 쥐는 힘의 위치, 움직임의 시작점, 전체적인 선 등 모든 것들이 달라지는 것 같았어요. 저는 기본 동작만 반복해도 느껴지는 아우라가 다르더라고요. 사실 그게 눈에 보이거든요."
"감독님께서도 그런 방향성을 원하셨어요. 태수에게 높고 낮음이 없고, 감정의 폭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셨어요. 태수가 감정적으로 드러나면 혹시나 너무 선해 보일 수 있거든요. 그런 것 없이 백지의 느낌을 내려고 했어요. 감독님께서도 '재우 입장에서 태수를 더 벽같이 느낄 수 있고. 상대를 해주지 않아야 더 트라우마를 촉발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태수에게 계속 힘을 빼고, 비워내려고 했어요. 검도라는 훈련 자체가 사실 마음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
태수는 재우와의 전사가 있었다. 재우의 가족과 연결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고, 태수의 구원자가 되어준 것이 재우의 아버지이자 그의 검도 사범님이었다. 검도는 그렇게 태수의 삶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리고 태수의 전사까지도 재우의 시선으로 담긴다. 그 속에서 문진승은 "계속 검도에 매달리는 사람은 어떨까, 검도를 통해 삶을 유지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에 대해 고민했다.
"검도는 '만분의 일초'로 결정되는 경기잖아요. 그만큼 집중력이 요구되는 스포츠인데요. 사실 우리가 어떤 것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건 잊게 되잖아요. 그래서 검도하는 순간만은 태수가 자신이 벗어버리고 싶고, 벗어나고 싶고, 반성하고 있는 부분들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재우가 검을 쥔 오른손의 힘을 푸는 것, 그 자체가 태수의 검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
사실 문진승은 능력 있는 IT 개발자의 길 위에서 돌연 배우의 길로 진로를 바꿨다.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던 어느 날 갑자기 침대에 누워있다가 '배우가 되어야겠다'라고 일어서 한국행을 택했다. 한 번도 배우의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를 했었고, 독일에서 머무는 기간에 단편영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쌓여 어느 순간 '느낌표'가 됐다.
"제가 좋아하는 공부와 개발자로서의 삶이 다르더라고요. 제가 개발자로 살아가면 그 자체로 행복할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돌아봤을 때, 영화 현장에서 인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나, 그 인물이 되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들이 저에게 행복했던 기억이 있어요. 결심한 건 순간이지만, 쌓아온 것들이 그 순간을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자신도 있었어요. 좋은 배우는 좋은 사람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자기 훈련과 반성도 많이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도 많이 해야 하고요. 저는 인문학책을 많이 보는 편인데요. 책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하면서 읽게 돼요. 그 모든 과정이 좋은 사람, 좋은 배우가 되는 길과 연결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연습하는 것에 쉽게 질리지 않는 편이에요. 지루한 걸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요. (웃음)" -
처음 한국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는 '배우'의 꿈을 숨겼다. 그리고 노력해서 단역으로 작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고백했다. 원래 "하고자 하면 하는 성격"인 문진승을 알기에 가족들은 반대보다 응원을 더해줬다. 문진승은 작은 인연을 통해 배우 하지원이 소속된 매니지먼트 해와달 엔터테인먼트에 안착했다. 한솥밥을 먹는 하지원은 영화 '만분의 일초'를 보고 문진승에게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도 정말 재미있게 봤다"라고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좋은 에너지를 받는 선배이기도 하다.
문진승은 여전히 연기에 대한 갈증이 있다. 스스로 '만분의 일초'라도 잡고 싶은 순간에 대해서도 "연기하는 순간"을 떠올렸다.
"감독님께서 '액션'을 외치면, 그 순간 정말 몰입해서 다 잊고 그 인물로 되는 지점. 그 만분의 일초를 느끼고 싶어요. 그런 만분의 일초들이 쌓여서 만분의 만초가 되지 않을까요? 배우로서 정말 황홀한 순간일 것 같아요." -
문진승은 간절함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앞서 밝혔듯, 오디션을 위해 머리를 싹둑 자를 수 있는 행동은 그의 진심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배우 문진승의 앞으로를 기대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외모적으로 그 인물처럼 보이면, 저는 거기에서부터 작은 정당성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오디션은 저를 선택해 주시는 자리니, 저를 선택하실 수 있도록 제 모습을 다 보여드리는 거라 생각해요. 군인 역할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오디션장에 임하는 거죠. 머리를 자를 때, 고민은 안 했습니다. 배우는 선택을 받는 직업이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있어요. 최선을 다해보지도 않고, 떨어진 후에 변명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보고 싶어요. 떨어져도 후회는 남기기 싫어서요."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