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가하 섬 근처에서 해양 액티비티를 즐기는 여행객(사진=서미영 기자)

사이판은 한때 한국인 해외여행의 등용문이었다. 신혼부부가 몰렸고, 아이 손을 잡은 가족이 줄을 섰다. 사이판은 그렇게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인의 여름을 책임진 섬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팬데믹의 충격에 항공 노선 축소, 고환율까지 겹치며 2024년 기준 방문객 수는 2019년 대비 6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수치만 보면 쇠락한 휴양지처럼 읽힌다. 그러나 사이판 섬 자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설이 작동하고 있다. 발길이 뜸해진 만큼 마나가하의 산호는 숨을 되찾았고, 그로토의 수중 시야는 더 깊어졌다. 북적이던 해변에 고요가 들어선 자리, 섬의 자연은 스스로를 회복하고 있다. 줄어든 관광객이 의도치 않게 사이판에게 돌려준 선물이다.

북마리아나의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인천에서 4시간 30분, 시차 1시간. 사이판은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가깝게 닿을 수 있는 미국령 태평양 섬이다. 연평균 기온 27도의 안정적인 기후 덕분에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

마나가하 섬 스노클링(사진=마리아나관광청)

사이판 바다 체험의 핵심은 두 곳으로 압축된다. 첫 번째는 마나가하 섬이다. 본섬에서 보트로 10~15분이면 닿는 이 작은 무인도는 섬 둘레를 따라 형성된 산호층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며, 얕은 수심에서도 열대어 떼가 눈앞을 가득 채운다. 물 위를 걷듯 들어서면 수족관 안에 들어온 착각이 드는 곳이다. 스노클링 장비만 있으면 누구든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진입 장벽이 낮지만, 한번 물에 잠기면 꺼내지기 싫어지는 바다다. 관광객이 줄어든 지금은 에메랄드빛 해변을 여유롭게 독차지할 수 있다는 보너스까지 붙었다.

사이판 그로토(사진=서미영 기자)

두 번째는 그로토다. 사이판 북동쪽에 자리한 천연 동굴로, 세계 3대 다이빙 포인트 중 하나로 꼽힌다. 동굴 천장의 틈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에메랄드빛 수면 위에 기둥처럼 내려서는 장면은, 사진으로 본 것과 실제가 전혀 다른 드문 풍경 중 하나다. 

다이빙 자격증 없이 스노클링으로도 그 안에 들어설 수 있어 초보자도 접근 가능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수심이 깊어지고 조류가 생기는 만큼 전문 가이드와 함께하는 것이 기본이다. 동굴 입구까지 내려가는 1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가 있지만, 물속에서 올려다본 천장의 자연 채광은 그 수고를 충분히 보상한다.

노을이 내려앉는 마나가하 인근에서 즐기는 요트투어사이판의 해질녘을 가장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방법으로 선셋 요트 투어가 꼽힌다. 3년간 요트로 세계를 일주한 트래블리즈 가족이 사이판에 정착해 직접 운영하는 이 투어는, 28인승 요트에 12명만 태운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다르다. 17시 30분 출항, 마나가하 섬 인근에 배를 세우고 스노클링·카약·패들보드·프리다이빙까지 다양한 해양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여기에 디너와 무제한 음료, 라이브 쇼까지 더해진다.

사이판 선셋 요트투어(사진=서미영 기자)

사이판의 선셋(사진=서미영 기자)

해가 기울며 바다의 색이 단계적으로 바뀌는 시간대에 선상 식사가 차려진다. 에메랄드빛이 주황으로, 주황이 다시 짙은 붉음으로 번지는 그 순간을 바다 한가운데서 맞는 것은 육지 어디에서도 대체되지 않는 경험이다. 가라판 인근에서 출발해 마나가하 섬을 품은 수평선을 배경으로 시간을 보낸 뒤 돌아오는 동선 자체가 사이판의 서쪽 해안선을 입체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 된다.

별을 보기 위해 설계된 공간 ‘밀키웨이 팜’
사이판의 밤이 낮보다 더 깊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옛 미군 주둔지를 개조해 만든 밀키웨이 팜(Milky Way Farm)은 사이판 유일의 프라이빗 천문대다. 오직 별 감상을 위해 설계된 공간이라는 수식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사이판 밀키웨이 팜(사진=서미영 기자)

사이판의 기존 별 관측 명소로는 만세절벽이 손꼽히지만, 수시로 오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와 미세한 조명들이 은하수의 선명도를 방해한다. 밀키웨이 팜은 인위적인 빛을 철저히 차단해 그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했다. 100% 예약제로 운영되는 덕분에 군중의 소음 없이 밤하늘을 독점할 수 있다.

약 450그루의 야자나무 숲 사이, 소규모 공연이 이어지는 가운데 풍등이 하나둘 하늘로 올라간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은하수의 밀도는 또렷해진다. 코코넛 음료 한 잔을 손에 쥐고 머리 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은, 낮 동안 바다에서 쏟아부은 에너지와 완전히 다른 결의 시간이다. 비교적 정적인 프로그램이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여행의 밀도를 높인다.

사이판 밀키웨이 팜 기념사진(사진=서미영 기자)

사이판이 한국인으로 가득했던 시절, 이 섬의 진짜 얼굴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마나가하 해변은 파라솔로 빽빽했고, 그로토 입구는 순서를 기다리는 여행자들로 채워졌다. 지금 사이판은 다르다. 섬은 조용해졌고, 여행자는 그 고요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숫자의 감소가 매력의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나가하의 바닷속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로토의 햇살은 오늘도 수면을 가른다. 야자나무 숲 위로 쏟아지는 별은 예전보다 더 선명하다. 북적이지 않는 섬에서 자기 속도로 바다와 하늘을 마주하는 경험, 사이판은 지금 그것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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