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조병수의 첫 국내 회화전 BB&M서 개막
건축가 조병수(BCHO 파트너스 대표)의 국내 첫 회화 개인전 <공간이 '繪'화가 될 때(When Space Becomes Painting)>가 오늘(16일) 서울 BB&M에서 개막했다. 6월 2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숨 프로젝트 이지윤 대표가 기획했으며, 막 페인팅·포레스트(Forest)·마킹(Marking) 시리즈를 비롯해 드로잉과 건축 아카이브까지 30여 년에 걸친 작업을 한자리에 펼쳐낸다.
개막에 앞서 지난 12일 진행된 프레스 워크스루에서 조병수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직접 말했다. "전부 엎드려서, 붓 대신 손과 몸으로 그렸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감정이 무엇인지 끄집어내기 위해 그렸다는 말이 뒤를 이었다. 전시 벽면에는 그가 직접 쓴 문장이 걸렸다. "나에게 예술은 삶의 여정이자 가슴 깊이 새겨진 사유의 흔적이며 영감의 샘이고 숨겨진 빛입니다."
전시의 중심 개념은 '막(幕)'이다. 막사발에서 따온 이 한국어는 그의 손을 거치며 미학적 언어로 자리를 잡았다. 조병수는 "한국 미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즉흥성"이라며 막사발·막걸리·맛김치를 같은 결로 엮었다. 시각적으로 정리된 완성이 아니라, 실제로 만지거나 맛봤을 때 느껴지는 따뜻한 감성, 그것이 '막'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인위적 욕심을 걷어내고 재료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자발적 비워둠'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는 하버드 대학원 시절부터 일관됐다. 조병수는 "설계 수업에서 제일 좋은 땅은 비워두고, 그 옆의 모자란 땅에 건물을 앉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부석사처럼 가장 좋은 자리를 비워 기(氣)가 흐르게 하는 한국 건축의 감성이었다. 교수들과 부딪히면서도 그 원칙을 지킨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 캔버스 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여백을 다룬다. 화면의 빈 자리는 장식적 비움이 아니라 바람이 통하는 중정처럼 숨 쉰다.
전시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메인 설치 〈포레스트(Forest)〉다. 전통 단청의 석채(돌가루)를 캔버스 위로 흘러내리게 해 숲 같은 선들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낱낱의 패널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면을 이룬다. 파란 석채로 바탕을 깔고 아교를 발라 눈에 보이지 않는 텍스처를 만든 뒤 물감을 흘려 선을 완성했다.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흘러내리면서 우연히, 자연스럽게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조병수의 말처럼, 화면 속 선들은 계획이 아닌 중력과 재료의 대화에서 비롯됐다.
마킹(Marking)〉 시리즈는 또 다른 신체성을 담는다. 엎드려 그린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연작은 서서 완성했다. 붓을 캔버스면에 대고 몸 전체가 옆으로 걸어가며 생긴 자국이 그림이 됐다. 재료에는 2023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당시 직접 채취한 흙과 해남 땅끝마을에서 퍼온 흙이 섞였다. 단청의 주색(朱色)과 한국 땅에서 퍼온 흙이 한 화면에서 만나 건축과 회화, 장소와 기억이 하나로 수렴되는 지점을 드러낸다.
전시 기획은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의 1969년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에서 미학적 계보를 잇는다. 이지윤 대표는 "제만이 예술가의 태도 자체를 형식으로 제시했다면, 조병수의 그리는 행위는 건축의 전제이자 그 이후에도 지속되는 사유의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초기 섹션에서 드로잉과 건축 아카이브로 사유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고, 메인 섹션에서는 회화와 설치가 하나의 공간적 경험으로 확장되는 구조다.
국제 미술계의 반응도 이미 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건축가 드로잉 소장에서 김수근에 이어 두 번째로 조병수의 초기 작업물을 구입했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7~8개월째 소장 검토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 앞서 밀라노 디자인위크, 시칠리아 라구사 아트 페스티벌에서 선보였으며, 5월 28일에는 런던 코로넷에서도 관련 전시가 이어진다.
조병수의 이번 전시는 30년간 건축과 나란히 이어온 회화 작업이 국내 관객 앞에 처음 놓이는 자리다. BB&M, 6월 2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