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도 극장을 사랑한 시간들의 고백…이종필X윤가은 감독 [인터뷰]
"영화는 오랜 친구와 같은 것이다.
찾아가면 나 대신 울어주고 웃어준다.
때로는 잃어버린 꿈을 이야기해 준다."
영화 '극장의 시간들' 속 대사다. 씨네큐브 25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세 편의 단편 영화에는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 감독이 각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장'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 단편 영화 세 편과 함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묶은 앤솔로지 영화 '극장의 시간들'이 됐다.
이종필 감독은 '침팬지'에서 자신이 꿈꾸었던 극장의 시절들을 돌아본다. 2000년 영화를 사랑하는 세 친구 고도(원슈타인·김대명)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은 '동물 이야기'라는 책에서 '침팬지'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 모모(이수경), 제제(홍사빈)와 함께 그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감독이 된 고도는 2025년 광화문에서 다시 그 '침팬지'를 만난다. 이는 이종필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몽환적'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아마도 '꿈을 꾸던 시절'이 녹아있기 때문일 거다.
영화 '우리들', '세계의 주인' 등의 작품을 통해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관객에게 전해준 윤가은 감독은 자신의 고민을 영화 '자연스럽게'를 통해 마주했다. 작품 속에서는 일곱 명의 어린이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감독(고아성)이 등장한다. 그의 작업 방식대로, '자연스럽게'는 상황에 대한 묘사만 있을 뿐, 구체적인 대사가 등장하지 않았다. 윤가은 감독의 표현대로 "헐렁한" 시나리오를 '자연스럽게' 채운 현장에 관한 이야기다.
Q. '극장의 시간들'은 영화와 극장을 중심에 둔 작품이다. 사실 상대방이 있는 사랑 고백은 입이 잘 안 떨어지기 마련인데, 두 감독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프로젝트에 임한 마음이 궁금하다.
이종필 감독(이하 '이 감독') "처음 제안받은 건 '씨네큐브라는 극장의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였다. '극장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는 아니었고, 그냥 극장만 나오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극장을 섭외하기 어려우니, 주최 측인 씨네큐브에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극장의 시간들'이라는 제목도 세 편의 작품이 완성된 후 달아주신 제목이다. 극장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은 사라진 씨네코아, 코아 아트홀, 단성사, 서울극장 등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새삼 '극장이란 뭘까?' 질문했다.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매체이고, 극장은 시간을 담는 공간인 것 같았다. 그래서 2000년과 2025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변하지 않은 건 무엇인지를 영화에 녹이고 싶었다."
윤가은 감독(이하 '윤 감독') "제안을 받고, '영화도 영화인데, 극장에 가는 경험이 왜 필요할까?', '난 극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필요한지 어떻게 말할 수 있지?'라고 고민하던 때였다. 요즘에는 집에서도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극장에서 보는 경험과는 다르지 않나. 저는 지금 관객에서 창작자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그 정체성이 뒤섞인 지금을 영화에 담아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극장의 시간들'에 임했다."
Q. 이종필 감독은 2000년대 후반, 선배의 영화 스태프로 처음 씨네큐브에 온 추억이 있고, 윤가은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개봉 당시 이창동 감독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대담을 씨네큐브에서 봤던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렇기에 '극장의 시간들'을 볼 때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 같다.
윤 감독 "'내가 안 나왔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다. (웃음) 사실 저는 영화에 대해 '늘 수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자연스럽게'를 볼 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여전히 '뭘 하지 않은 것'.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라고 디렉션을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장면이 '여전히 더 좋구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를 통해 발견했다. 예를 들면, '자연스럽게' 속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감독이 디렉션을 할 때, 나무에서 우연히 열매 하나가 툭 떨어진다. 그런 지점이다. 어린이 배우들에게 '엄마가 현장에 있는 게 좋아? 없는 게 좋아?'라고 물어볼 때, 입을 모아 '없는 거'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런 건 요청해서 나올 수 없는 순간이다."
이 감독 "'침팬지'에는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담겼다. 오래전 친구와 영화를 본 순간, 나아가 수 없이 많은 영화들을 극장에서 마주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가 어둠 속에서 다시 나온 기분. '침팬지'를 볼 때, 그런 저의 기록들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혼자 감흥한다."
Q.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윤가은 감독의 '자연스럽게' 속에는 늘 궁금했던 감독님의 작품인 '우리들', '세계의 주인' 등의 촬영 현장을 엿보는 듯 느낌이 들었다. 앞서 고아성 배우를 언급하며 "헐렁한 영화를 채워줬다"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대사가 없었던 건가.
윤 감독 "대사가 거의 없었다. 아예 없었다. 시나리오 속에는 몇 줄로 그 장면에 필요한 필수적인 것들을 기술해 놓은 정도였다. 예를 들면 '감독이 '레디 액션'을 외치면, 아이들이 멀리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다를 떤다'라고 적어놓은 정도였다. 그러면 아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해요?'라고 물었고, 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라고 답했다. 테이크를 반복하는 게 핵심이었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재미있게 찍고 싶었는데, 그걸 부담스러워해서, 회의하며 내려오는 걸 찍었다. 길게 찍고, 편집 때 이렇게 하면 스토리텔링이 될 것 같다고 맞춰갔다. 제 아이디어가 반, 편집 감독님의 아이디어가 반, 이렇게 완성된 것 같다."
Q. 이종필 감독의 '침팬지들'에는 '국외자들' 속 댄스와 대사 속 타르코프스키 감독 언급 등 영화에 대한 애정이 짙게 묻어난다.
이 감독 "영화광인 세 친구의 풍경을 표현하기에 그 춤만큼 짧은 시간에 임팩트있게 보여주기 좋은 게 없었다. 그 춤을 세 배우에게 보여줬고, 원슈타인은 리듬감이 있으셔서인지 곧잘 따라 추셔서 영상으로 보내주셨다. 이수경은 원데이 클래스로 댄스 학원에 다녔던 걸로 알고 있다. 홍사빈은 막 제대해서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익혔다. 재미있게 찍었지만, 개인적으로 '편집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열심히 임한 세 사람이 어떻게든 들어가서 다행이다."
Q. '침팬지' 속 이야기가 이종필 감독의 실화라고 이야기했는데,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실화인가.
이 감독 "동물원 게시판에 글을 남긴 것도 실화다. 이상하지 않나. 몇 년 후에 같은 책을 보았을 때, 과거 내가 본 침팬지에 관한 이야기가 사라져있었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거다. 제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했거나, 그 책 속에는 처음부터 정보만 있었는데, 제가 책을 읽으면서 상상해 버린 걸 기억했거나. 그래서 실제로도 침팬지를 보러 동물원에 자주 갔었다. 살아가다 보면, 그런 것들이 있지 않나. 시간이 지나서 없어진 것들. 그게 영화일 수도 있고,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들일 수도 있고, 어떤 그 시간이 영화에 들어온 거다. 사라졌지만, 없었던 것이 아닌 시간들."
Q. 이종필 감독은 '극장의 시간들'의 문을 열고 닫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도 함께 연출했다. 실제로 씨네큐브에서 25년 동안 영사실에 근무하신 홍성희 영사실장님께서 등장하시는 다큐멘터리 같은 기록이다. 영화를 틀고, 닫는 일상을 세대와 함께 기록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이 감독 "씨네큐브도 영업 중인 극장이기에, '침팬지'를 밤에 영업이 끝난 밤에 찍어야했다. 영사기 불빛이 들어오는 장면이 필요했는데, 저희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홍성희 영사실장님께서 틀어주셔야 했다. 그분은 첫 상영시간보다 약 2시간은 일찍 출근하셔서 이것저것 체크도 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날도 9시쯤 첫 상영이라, 아침 7시부터 나오신 건데, 저희 때문에 밤 12시까지 영사실에 계셔야 했다. 죄송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픽션'의 현장에서 보이는 '영사실'의 실장님이 진짜의 존재라는 점이 묘했다. '극장의 시간들'을 총괄하는 피디님께서 '작품의 시작과 끝에 무언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막연하게 영사 기사님을 감히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영화 '파반느'의 아이슬란드 촬영을 위해 사놓은 카메라가 있어서 그거 하나 갖고 저 혼자 찾아가서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카메라를 먼저 꺼내지 않고, 적당할 때 쓱쓱 찍었다. '시네마 천국' 속 필름 시스템과 달리 디지털 상영 시스템은 자동화 되어있다. 그런데 실장님께서는 씨네큐브 2개 관을 계속 왔다 갔다 하시면서 계속 체크하셨다. 그걸 체크하실 때, 두 손을 모으고 보시는 게 인상 깊었다. 아마도 자동화 시스템에 오류가 났다면, 그 손을 풀고 바로 조처하셨을 거다. 씨네큐브에는 필름 영사기도 있다. 그래서 젊은 친구가 영사 기술을 배우는 과정이 있으면, 이야기의 완결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사 기사님께서 가르쳐주셨다. '꼭 자동으로 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등의 대사도 홍성희 영사 기사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신 거다."
Q. 영화를 너무나 사랑했던 시간들, 영화를 보면 누구보다 크게 웃었던 시간들, 누구보다 슬프게 울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작품에 담겼다. 관객에게는 '극장의 시간들'이 어떻게 가닿기를 바랄까.
이 감독 "저는 딱 한 명의 관객을 상상한다. 누군지는 모른다. 제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방황하다가, 극장에 와서 스크린을 보게 되는 관객. 그 영화가 '너무 좋다' 할 수도, '이건 뭐야.' 할 수도, 심지어는 잘 수도 있다. 그렇게 극장을 나가지만, 그 끝에는 영화가 기억에 남아있는 그런 작품이 되면 좋겠다. 천만 영화의 꿈을 꾸어본다. (웃음)"
윤 감독 "결국 영화는 관객을 만나려고 만든다. 이걸 이 작품 다 보고 느꼈다. 다 묶였을 때 비로소 본 거다. 프롤로그부터 세 편의 영화와 에필로그까지 다 보고나니까, 영화를 좋아했던 과거도 있고, 영화를 팬의 관점에서 좋아했던 그때도 있는 것 같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도 있는 것 같고,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도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영화와 아무 관계 없이 살아가다 우연히 몇십 년 만에 영화를 본 사람도 '극장의 시간들'에는 다 있더라. 그래서인지, '극장의 시간들'은 모든 관객의 마음에 들기보다는, 관객이 더 적극적으로 와서 찾아갈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봐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풍선처럼 벅찬 마음을 어디 쏟아낼 곳 없나 찾아 헤매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춤을 춰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포스터를 붙여보기도 하고, 편지를 써보기도 했다. '극장의 시간들'은 그때의 시간을 손에 잡힐 듯 감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화와 극장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조용히 되묻는다. 지금, 당신은 어떤 '극장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까. '극장의 시간들'은 씨네큐브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극장가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