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 배우 박정민 / 사진 : 샘컴퍼니

한 달 전이지만, 지난해가 되어버린 12월, 박정민은 '책발전소 북클럽' 12월의 큐레이터로 선정돼 한 권의 책과 그 책을 선정한 이유를 담은 레터를 전했다. 박정민이 선택한 책은 얀 마텔 작가의 '파이 이야기'. 그는 직접 쓴 레터에서 "'파이 이야기'를 후벼 파고 있습니다"라며 "예전부터 좋아했던 소설을, 공연을 통해 다시 접하면서 이 책에 대한 저의 새로운 시선과 그에 따른 이야기를 소소하게 공유해보고 싶었습니다"라고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인터뷰로 만난 박정민은 물론 같은 사람이었지만,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출판사 '무제'의 대표로 지내다가 오랜만에 연기라는 배우 본업의 현장으로 돌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227일 동안 태평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 남겨진 소년 파이와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의 생존기는 그에게 '삶'을 바라보는 다른 지점을 선사했다. 무대 위에 태평양을 만들고, 호랑이와 함께 날아다니는 경험을 통해서다. 사실, 호랑이는 '퍼펫'이라고 불리는 인형이었고, 날아다니는 경험도 퍼펫을 움직이는 '퍼펫티어'들로 인해 가능했지만 말이다. 관객이 무엇을 믿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파이가 이야기하는 두 가지 이야기처럼 말이다.

출판사 '무제'의 대표로 인터뷰 할 당시 박정민의 모습 / 사진 : © 2025, 우상희 All rights reserved

Q. 영화 '휴민트' 촬영 후, 출판사 '무제'의 대표로 출판계 쪽에서 활약하다가, 배우 본업으로 오랜만에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 현장이 '무대'인 것도 놀랍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약 8~9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조금씩, 아주 더러 제안이 있기도 했었는데, 잘할 자신이 없어서 죄송하게도 고사를 드렸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오디션 제안이 왔다. 제가 크게 좋아하는 영화였고, 소설이지만, 동시에 무대에 올라가서 하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라트비아에서 촬영하고 있을 때, 대표님께서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영상의 유튜브 링크를 보내주셨다. 기가 막히더라. 멋있고, 근사했다. 이 정도로 갖춰진 무대라면, 쓱 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휴민트' 촬영 끝나고 쉬려고 했다. 다시 일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이 작품을 무대로 옮긴 공연을 하면, 앞으로 배우 생활 하는 데 있어서 자양분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Q. 무대에 오르기 전 굉장히 긴장도 많이 되었을 것 같은데, 프리뷰 공연 때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기립박수는 앞 사람들이 일어나서 어쩔 수 없이 뒷사람들도 일어나는 건 아닌가 생각해서 크게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앞에서 바라보면 너무 감사하고 소름 돋긴 했다. 하지만 '관객 모두가 같은 마음일까'라는 면에서는 아직 의심이 있다. 너무 감사하다. 과거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때는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제가 뒤에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마다 '이 문이 제발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라이프 오브 파이'는 제가 첫 등장이 아니다. 침대 안에 들어가 있다가 어영부영 시작하게 된다. 그 부분이 마음이 놓였다. 제가 좋아하는 선배님과 동료들이 무대를 열고 저를 불러주면, 제가 쓱 나와 그들과 어울리면 된다는 안도감이 부담을 줄여줬다. 유독 백스테이지에서 응원을 많이 해주셨다. 떨지 말라고, 긴장하지 말라고. 너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잘 못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다들 안아준다. 그 마음에 안도하는 게 있다. 객석의 관객들은 잘 보이지 않겠지만, 서로 바라볼 때 느껴지는 교류가 있다. '너 무대에 있구나, 괜찮아?'하는 찰나의 느낌이다. 그 눈을 보면 안도가 된다. 그래서 부담감이 적어졌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에 임하고 있는 배우 박정민 / 사진 : 에스앤코 제공

Q. 한국 기준으로, 2004년 발간된 소설 '파이 이야기'는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 영화로 개봉했다. 그리고 2019년 영국에서 최초로 무대 위에 올려졌으며, 이번 한국 공연은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유일한 공연이다. 소설과 영화를 좋아했고, 한국어 공연에 '파이'로 임하며 매체마다 다른 온도를 느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연극이 더 원작에 닿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현재의 시점이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회상하고, 회고하다 보니 감정이 많이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파이가 자신의 선택에 있어서 후회하고, 절망하는 과정이 덜 격정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연은 구조되고 며칠이 지난 후의 이야기다. 심지어 17살 소년이 '엄마가 죽었지'라고 관조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 임하는 제 마음이 여러 갈래로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파이가 괜찮아졌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이의 억울함, 슬픔, 좌절, 절망 등이 담겨야 관객들이 더 파이에게 이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에 임하고 있는 배우 박정민 / 사진 : 에스앤코 제공

◆ "오디션…'망했네'하고 들어갔다 '행복했어'하고 나왔다"

Q. 영화나 시리즈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액션을 선보였지만, '박정민이 이렇게 몸을 잘 쓰는 배우였나' 감탄할 정도로 다양한 방식으로 몸을 사용한다. 퍼펫티어들에게 들려 날아가는 장면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연기를 놓지 않는 지점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오디션을 보러 갔다. 약 한 시간 반을 보더라. 그런데 외국 분들이시니, 제가 '박정민은 오늘 밥을 먹고 오지 않았다'라고 외쳐도 대사인 줄 아시지 않겠나. 그렇게 대사 오디션은 금방 끝났다. 그리고 뭘 요구하셨냐면, 퍼펫티어 세 분과 같이 서로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들고 싶으면 들어보라고 하셨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거다, 답이 없는 거.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같이 움직이고, 퍼펫티어들이 저를 들어올리기도 하는데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물이 확 나왔다. 저도 좀 신기했다. 오디션에 갈 때는 '망했네'하며 들어갔는데, '나 오늘 너무 행복했어'하고 나왔다. 그 과정을 연습하는 기간에 똑같이 했다. 처음 연습실에 들어갔는데, 연습은 안 하고, 만지고, 교류하고, 들고, 이런 걸 하라고 하셨다. '대사 안 외워요?'라고 여쭤봤는데 괜찮다고, 서로 게임하고 그랬다. 그 과정을 겪고 나니, 제가 이 사람들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믿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저를 들어 올려주지 않나. 제 신체를 지탱하는 손이 다 느껴진다. 그런데 '파이'인 저를 다른 공간에 집어넣어 주려고 하는 노력이, 손끝 감각이 너무 섬세해서 거기에 감동을 받는다. 세 명의 호흡이 착 맞아야 제가 올라간다. 그때 호흡이 탁 맞았을 때의 감동은 매 회마다 새로운 느낌이다. 그런 것들이 되게 좋다. 저를 파이로 계속 연결될 수 있게 해주니까, 그런 도움을 많이 받는 것 같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에 임하고 있는 배우 박정민 / 사진 : 에스앤코 제공

◆ "첫 번째 이야기가 진짜일 수도 있겠다고…'파이'에게 더 가까이"

Q. 그런 과정 속에서 '파이'와 동일시된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 같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고 느껴지는 건, 제가 소설과 영화를 볼 때 모두 두 번째 이야기가 사실이고, 첫 번째 이야기는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그럴 거로 생각한다. 어느 정도냐면, 영국에서 오신 연출님께서 저에게 '첫 번째 이야기가 진짜라고 한 번만 믿어보면 안 돼?'라고 말씀하실 정도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그게 진짜가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기하는 도중에, 첫 번째 이야기가 진짜일 수도 있겠다고, 혹은 두 이야기 중 어떤 것이 진짜여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다. 그때 파이에게 한 발짝 다가간 것 같다. 앞으로도 하다 보면 또 느껴지는 게 있을 것 같다. 가장 고무적인 순간은 그 순간이었다."

◆ "퍼펫이 호랑이가 되어 감정을 선물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

Q.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쟤네 괜찮을까?' 싶다. 그 안이 되게 좁다.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들어가서 안쓰럽다. 호랑이를 보고 있으면, 팀원들이 걱정되는 마음이 크다. 호랑이 자체만 생각하면, 공연 전에 몰래 백스테이지에 가서 호랑이 '퍼펫'을 보고 나온다. 오늘은 얘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니까. 걸려있는 '퍼펫'을 보는데도 신기하다. 아무 표정도 없고, 살아있지 않은 친구가, 결국 내 감정 상태로 무대 위에서 보이기 시작하고, 살아있는 생명체로 다가오니까. 퍼펫이 호랑이가 되어 나에게 감정을 선물한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 박정민 캐릭터 포토 / 사진 : 에스앤코 제공

◆ "'온전히 사랑해' 대사…마음의 모양은 비슷한 것 같다"

Q. '라이프 오브 파이'에 임하며, 스스로 꼽는 명대사가 있을지 궁금하다.

"'너를 사랑해, 리차드 파커. 너를 온전히 사랑해'라는 대사를 좋아한다. 그 대사를 할 때마다, 대사는 같지만, 대상이 바뀐다. 호랑이에게 할 때도 있고, 파이에게 할 때도 있고, 박정민에게 할 때도 있다. 언제인가 한 번은 호랑이 안에 있는 퍼펫티어에게 한 적도 있다. '너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여기까지 잘 왔다'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러면 그 친구가 울고 있다. 그때그때 그 마음의 모양은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뻗어나가는 대상이 달라진다. 의도적으로 바꾸는 건 아니다. 오늘은 이 사람에게 말하고 싶고, 오늘은 호랑이에게 말하고 싶고, 충동이 달라진다. 그 대사를 할 때마다 걱정도 되지만, 기대도 된다."

◆ "연습할 때부터 빼지 않았다…굉장히 고무적인 사건"

Q.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박정민'이라는 사람이 마주한 어떤 변화도 있을 것 같다.

"저는 연기하는 저 자신을 보여주는 걸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긴 하다. 촬영할 때도 카메라가 돌지 않으면, 연기를 잘 못 하겠다, 그 순간만 저에게 허락된 시간인 것 같아서. 그래서 리허설을 할 때나, 리딩할 때 부끄럽다, 내가 남인 척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카메라가 돌면 '남인 척해도 괜찮아'라고 해주는 것 같다. 그 느낌이 좋아서 업으로 하는 거다. 그래도 사실 연기하는 걸 부끄러워한다. 그런데 '라이프 오브 파이' 때는 마음가짐을 조금 바꿔봤다. 왜냐하면, 저를 제외한 배우들이 무대에 특화된 베테랑 배우들이다. 그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내가 못 해도 상관없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한 번 해볼까요?'라고 말씀하시면, 제가 먼저 달려 나가서 해봤다. 연습할 때부터 빼지 않았다. 신기했다. 평소 같으면, 할 때만 하고, 안 하는 사람이었는데, 부끄러워도 그냥 가서 해보는 것이 '꽤 재미있고 발전적인 행동이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래서 '앞으로도 조금 덜 부끄러워해 볼까'라는 마음가짐이 생긴다. 저에게는 굉장히 고무적인 사건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에 임하고 있는 배우 박정민 / 사진 : 에스앤코 제공

박정민에게 ‘라이프 오브 파이’는 무대 위 한 작품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의 각도를 미묘하게 바꿔놓은 경험이었다. 인터뷰에서 그 포인트를 다섯 가지로만 정리했을 뿐이지만, 그는 해보지 않았던 것을 몸으로 통과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감각하기 시작했다.

박정민은 파이가 거북이를 잡아먹는 순간을 공연의 전환점으로 꼽는다. 살기 위해 신념을 내려놓지만, 동시에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하며 “나는 믿었기에 살아남았다”라고 되뇌는 순간. 박정민은 그 장면의 핵심을 결국 ‘삶’이라고 말한다. 무대 위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일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가 무대 위에서 “죽음은 삶을 부러워하죠. 삶은 정말 아름다우니까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 자체가, 어쩌면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작품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오는 3월 2일까지 GS 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그리고 오는 1월 13일(화) 오전 11시 마지막 티케팅이 오픈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 배우 박정민 / 사진 : 샘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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