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꿈에게...‘만약에 우리’ [리뷰]
‘만약에 우리’는 과거에 사랑했던 연인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때 간절히 꾸었고 결국은 내려놓아야 했던 꿈에 대한 이야기에도 가까이 자리한다. 변했지만, 그럴 수 있다. 지난 사랑과 꿈에 미안할 일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다.
2014년, 은호(구교환)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정원(문가영)을 만난다.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알아본다. 호찌민에서 인천으로 향하려던 비행기는 태풍으로 인해 출발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과거 두 사람이 만나던 날처럼 말이다. 2008년,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은호는 우연히 정원을 본다. 정원은 비 오는 날 빨간 꽃 앞에서 빨간 우산을 쓰고, 빨갛게 불이 붙은 담배를 피고 있다. 은호는 그런 정원을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의 스케치북에 쓱쓱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고향집에 가려고 탄 버스의 옆자리에서 다시 정원을 만난다.
은호는 정원이 듣는 '사랑은 봄비처럼’ 한순간 마음을 주지만, 현실은 버벅거리고, 머뭇거리고, 종이 인형처럼 버스 안에서 쓰러지기나 하고, 어디 하나 온전치 않다. 산사태로 더 갈 수 없게 된 고속도로에서 은호는 자신을 데리러 온 아빠(신정근)의 차에 정원도 같이 태운다. 그렇게 고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서울로 돌아온 은호는 싸이월드라는 온라인상의 집들을 헤매며 정원을 찾아낸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처음에는 친구로 그다음에는 연인 사이로, 마음을 쌓다가, 변해버린 현실에서 서서히 그 마음을 무너뜨리고 각자의 길로 나아간다.
은호와 정원이 만나는 곳은 어딘가로 이동하는 길 위에서다. 살아가는 길 위 어느 한 시점에서 만나는 것 처럼 말이다. 2024년 현재는 비행기 안에서였고, 2008 처음 만날 때는 고속버스 안에서였다. 그들은 살아가는 한 지점에서 만났고, 또 각자 어떤 자리에 있든 계속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꿈을 꾸며 만났고, 어느 순간 자신의 꿈보다 상대의 꿈을 소중히 여기다, 그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워졌을 때 이들은 서로를 놓게 된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그 자리를 더듬거리며 회상하는 두 사람 역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비행기 위에서다. 태풍으로 무너진 산 앞에서, 멈춘 공항에서 잠깐 멈춰 돌아보고, 다시 고속버스를,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는 거다.
‘만약에 우리’는 은호와 정원의 몫으로 가득 채워진 작품이다. 그만큼 구교환, 문가영의 몫이 크다. 구교환은 정원을 향해 자꾸만 삐져나오는 은호의 마음을 바들바들 떨며 찢는 종이에 담아내고, 뒷모습에 ‘그대 사랑합니다’라는 노래로 고백을 하다가, “이 동네 섹시가이 되는 거 아니야?”라는 너스레로 정원을 안심시키고는, 결국 자기의 심장을 떼어주겠다고 고백하며 정원이 머무를 집이 되어준다. 기존에 있는 로맨스의 문법과는 다른, 구교환만의 언어와 호흡은 '은호'를 가장 '은호답게' 한다.
문가영은 부모와 집이 부재해 자신의 마음을 잘 걸어 잠그고 있는 정원의 모습부터 은호의 마음이 봄비처럼 스미고, 겨울비처럼 눈물 쏟아내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렇기에 그가 이후에 내뱉는 ”모든 걸 다 주고 싶었어“라는 대사가 고스란히 와닿는다. 이 영화에서는 눈물을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흐르게 하는데, 그것은 문가영이 보여주는 감정의 몫이 크다. 버스에서 또 편지를 마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전작에서 본 적 없는 표정들로 놀라움을 더한다.
구교환과 문가영이 묘사하는 사랑의 상실은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아 더 가까이 자리하게 한다. 그 상실은 길 밖에 내놓아 바래진 소파에 있고, 같이 끼다가 혼자 끼는 이어폰에, 상대방을 향하게 하던 선풍기를 내 방향으로 돌려놓는 손 등에 담겨있다.
이는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 속 현재는 흑백으로 과거는 컬러로 그려지는 결을 같게 가져가면서도,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등의 곡과 싸이월드 파도타기 등을 타고, 우리나라에서 꿈꾸는 20대에 만난 첫사랑, 혹은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에게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 시절은 꿈으로도 읽히고, 사랑으로도 읽힌다. 김도영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때 꿈꾸던 나를 떠올리게 하기에 반갑다. 그 시절 우리의 뒤에 있던 부모님 역시 눈물을 자아낸다. 또, 주인공의 이름이 ‘은호’이고, 고속버스나 비행기에서 재회하기에 같은 이름 ’은호‘(손예진)가 등장했던 과거 드라마 ’연애시대‘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꿈과 사랑을 이야기한 영화 '라라랜드'를 좋아한 이들에게도, 그리고 첫사랑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건축학개론'을 좋아했던 이들에게도 반가움을 더할 거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극장을 나오는 길에 꿈꾸고 사랑하고 있는, 혹은 꿈꾸었던 나를, 누군가를 사랑했던 나를 마주하고 안아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러닝타임 114분,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