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브렁 마을에서 내려다 본 세르 퐁송 호수와 마을의 모습(사진촬영=서미영 기자)

프랑스 남동부, 알프스 산맥의 남쪽 자락을 따라 달리면 갑자기 푸른빛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바로 세르 퐁송(Lac de Serre-Ponçon)이다. 뒤랑스(Durance) 강을 막아 1960년대에 완성된 인공호수지만, 그 규모와 풍경은 자연호수라 해도 믿을 만큼 장대하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그 너머로는 만년설이 남은 알프스의 봉우리가 배경처럼 펼쳐진다. 세르 퐁송만 들렀다 가기 아쉽다면 남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고요의 여행지' 2곳을 함께 가봐도 좋겠다.

관광객의 소음보다 바람과 새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숲 속에 위치한 보스코동 수도원(Abbaye de Boscodon)과 마을 자체가 '알프스 속 작은 도시'라 불리는 앙브렁(Embrun) 마을이다.

수도승의 숨결이 남은 돌의 수도원 ‘보스코동’
세르 퐁송에서 차량으로 20분 거리에는 한때 수도승들이 은둔했던 보스코동 수도원이 있다.

보스코동 수도원의 외관(사진촬영=서미영 기자)

보스코동 수도원의 내부(사진촬영=서미영 기자)

1142년에 세워진 보스코동 수도원은 로마네스크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여느 화려한 성당과는 다르다. 스테인드글라스도, 장식 조각도 없다. 오직 보스코동 인근 채석장에서 캐낸 돌의 자연스러운 질감만이 공간을 채운다. 교회와 수도원 건물 모두가 극도로 단순하고 조화롭게 설계되어,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빛과 석재, 그리고 건물의 비례만으로 공간미를 드러내는데, 그것이 이 수도원의 아름다움이다.

보스코동 수도원의 내부(사진촬영=서미영 기자)

수도원 내부로 들어서면 기하학적 완벽함이 눈에 들어온다. 교회의 7개 둥근 천장은 일주일의 7일을 상징하고, 모든 비율은 황금비를 따른다고 한다. 십자가 모양의 직선과 둥근 천장의 곡선이 만드는 균형, 빛과 그림자의 조화. 12세기 샬레 수도회 수도사들이 추구했던 '정화와 조화'의 철학이 돌과 공간으로 구현된 곳이다. 

화려한 장식 없이도 수도원 내부는 석재의 질감이 빛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평온함을 만든다. 교회 내에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십자가가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빛과 그림자가 공간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해 신성한 분위기가 전해진다. 수도승들이 세속의 번잡함을 버리고 자연과 교감하려 했던 이유가 이 공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알프스의 작은 니스'라 불리는 앙브렁(Embrun)
보스코동 수도원을 나와 언덕 위에 자리한 도시 앙브렁(Embrun)으로 향했다. 앙브렁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여러 시대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고대 로마 시대 성벽, 중세의 골목길, 바로크 시대의 대성당, 그리고 현대의 카페와 시장. 모든 시간의 층위가 좁은 구시가지 안에 압축되어 있다.

앙브렁 마을에 있는 노트르담 뤼알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u Réal)(사진촬영=서미영 기자)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노트르담 뤼알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u Réal)이다. 12~13세기에 지어진 대성당은 프랑스 알프스에서 가장 웅장한 고딕·로마네스크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넘어가던 과도기 양식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이 성당은, 보스코동 수도원의 절제된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녔다.

앙브렁 마을에 있는 노트르담 뤼알 대성당 내부(사진촬영=서미영 기자)

로마네스크와 초기 고딕 양식이 혼합된 이 건물은 회색과 흰색의 돌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패턴이 인상적이다. 입구의 석사자 두 마리가 성당을 지키듯 서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800여 년의 세월을 견딘 오르간이 눈길을 끈다. 

앙브렁 마을에 있는 노트르담 뤼알 대성당의 오르간(사진촬영=서미영 기자)

15세기 루이 11세가 기증한 오르간으로, 수많은 파이프가 기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여름철이면 바흐부터 현대 음악까지 다양한 콘서트가 열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 대성당의 진짜 보물은 따로 있다.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보물 전시실에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수집된 500여 점의 성물과 예술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금과 은으로 만든 성체통, 보석으로 장식된 성유물함, 금실로 수놓은 사제복, 바로크 양식의 제단.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종교 예술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다.

'알프스의 작은 니스'라고 불리는 앙브렁 마을(사진촬영=서미영 기자)

대성당을 나와 구시가지를 걸으면 앙브렁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난다. 파스텔 색조로 칠해진 건물들, 좁은 골목길 사이 작은 광장들... 앙브렁이 '알프스의 작은 니스'로 불리는 이유는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알프스 지역치고는 건조하고 온화한 기후, 알록달록한 중세 도시의 분위기, 활력 넘치는 카페와 레스토랑 문화가 지중해 연안 도시를 연상시킨다. 프로방스가 '향기·색채·평원'의 지역이라면, 세르 퐁송과 앙브렁은 '물·산·휴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프로방스의 화려함이 부담스럽거나, 알프스의 험준함이 두렵다면, 세르 퐁송 호수를 품은 이 명소들을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물과 산, 숲과 마을, 고요함과 활력이 균형을 이루는 곳. 그것은 그냥 관광이 아니라, 남프랑스 알프스가 선사하는 선물 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 취재 협조 : 프랑스 관광청, 에어프랑스, 프로방스 알프 코트다쥐르 관광청

홈으로 이동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