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차별 종식을 위한 ‘레드 마침표’ 캠페인 출범

“이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는 하루 한 알의 약으로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입니다. 그러나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1980년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10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HIV 차별 종식을 위한 레드 마침표 캠페인’ 기자간담회에서 진범식 국립중앙의료원 감염내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레드 마침표 캠페인은 대한에이즈학회, KNP+(한국 HIV/AIDS 감염인 국가네트워크), 신나는센터 등 의료계·학계·시민단체가 함께 결성한 협의체가 주도하는 장기 프로젝트로, HIV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번 간담회에서는 HIV 치료 기술이 크게 발전했음에도 사회적 인식은 제자리인 현실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HIV 차별 종식을 위한 레드 마침표 캠페인’ 기자간담회에서 패널들이 HIV 인식 개선과 사회적 연대 필요성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김정아 기자

관리 가능한 질환, 그러나 인식은 제자리

진범식 교수는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ART)의 발전으로 HIV는 조기 진단·치료만 받으면 일반인과 유사한 수명을 보인다”며 “혈액 속 바이러스가 미검출 상태가 되면 성 접촉을 통한 전파도 없다”고 강조했다.

WHO와 UNAIDS 역시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기대수명이 일반 인구와 다르지 않고, 성 접촉 전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이른바 ‘U=U(Undetectable=Untransmittable)’ 개념이다.

진 교수는 “2017년 HIV 양성 진단을 받은 환자를 5년간 추적한 한 국내 연구에서는 자살 사망 위험이 일반 인구보다 1.84배 높게 나타났다”며 “이는 HIV 자체의 치명성보다 사회적 시선이 더 큰 문제임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HIV, AIDS와는 달라

전문가들은 HIV와 AIDS를 혼용하는 잘못된 인식이 낙인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HIV는 바이러스 감염 자체를 뜻하지만, AIDS는 치료받지 못해 면역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하면 HIV 감염이 곧바로 AIDS로 이어지지 않으며, 정상적인 생활과 성생활, 임신과 출산도 가능하다.

이종혁 광운대학교 교수는 “HIV와 AIDS는 같지 않다”며 “이번 캠페인은 그동안 혼용돼 온 인식을 바로잡고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이해를 확산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에이즈=죽음의 병’이라는 공포 이미지는 1980년대 언론 보도가 만든 잔재라고 지적했다. 당시에는 치료제가 없어 HIV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병으로 보도됐지만, 이후 ART 발전으로 HIV는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사회 인식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진범식 국립중앙의료원 감염내과 교수가 HIV 치료 환경의 과학적 진보와 사회적 인식 개선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차별이 남긴 상처

HIV 감염인 당사자 단체인 KNP+의 손문수 대표는 “응급환자가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한 적이 있다”며 “의료진조차 편견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의대생 단계부터 HIV와 AIDS에 대한 정확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보고서 ‘PLHIV Stigma Index 2023’에 따르면, 전 세계 감염인의 37.6%가 내부화된 낙인을 경험했고, 24.9%는 의료 서비스에서 차별을 겪었다. 국내 조사에서도 HIV 감염인의 자살률이 비감염인보다 1.8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발표된 ‘2025년 HIV 국민 인식 조사’(한국리서치, 전국 3,000명 대상)는 같은 문제를 다시 확인시켰다. 응답자의 80%는 HIV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81%는 정부 차원의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HIV에 개방적이라고 답한 비율은 13%에 그쳤다.

김승환 신나는센터 상임이사는 “과거 일부 조사에서는 동성혼 지지율이 40%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며, 사회 태도가 변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희망을 덧붙였다.

낙인에 마침표를

김태형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 감염내과 교수(대한에이즈학회 기획이사)는 “20년 전만 해도 감염인이 아이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자연 임신과 출산까지 가능한 시대가 됐다”며 “HIV는 예방과 치료, 관리가 가능한 만성질환이라는 사실을 사회가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낙인에 마침표를 찍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과학적 혜택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의체는 이번 출범을 시작으로 온오프라인 교육, 대국민 홍보, 의료 현장 개선 프로그램 등 다방면의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프로젝트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다.

편견 없는 사회, 예방은 필수

HIV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감염병이 아니다. 일단 감염되면 평생 약을 먹어야 하고, 장기적으로 심혈관 질환·신장 질환·골다공증 같은 합병증 위험도 따른다. 반면 전파는 혈액, 성 접촉, 임신·출산·수유 과정에서만 가능하다. 일상적 접촉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

PrEP(노출 전 예방제)와 PEP(노출 후 예방제) 같은 예방 수단을 활용하면 감염 위험은 크게 줄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감염자에 대한 차별은 멈춰야 하지만, 예방의 중요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며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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