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소시민 17'에게 응원 버튼 꾹…'미키 17' [리뷰]
'3D 프린터'라는 생소한 단어를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눈앞에 모형이 프린팅되는 것을 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덜컹거리며 나오는 종이 한 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투박했던 과거를 지나 이제는 섬세하게 출력되는 완성도에 다시 한번 놀라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 등장한 기술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발전한 기술에 당황하게 되곤 한다.
영화 '미키 17'에는 그것처럼 '휴먼 프린팅'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프린터기에 종이를 넣듯, '휴먼 프린터기'에 재료를 넣으면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며 입력된 '사람'이 출력된다. 사람이 출력되면, 기존 기억을 심어 넣어 이전 사람과 새롭게 출력된 사람을 연결한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우주에서 사람이 정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해낸다. 직업명은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용이라는 듯)'. 예를 들어, 익스펜더블은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인지 알아보기 위해, 내려가서 공기를 마시고, 그 행성의 바이러스로 인해 수없이 죽어가며 백신 개발에 일조한다. 실험 쥐 같은 일도, 자칫하면 죽을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일도 해내는 그 직업, '익스펜더블'을 가진 '인간'이 바로 미키다. 미키는 그런 식으로 16번 죽었고, 17번째 출력됐다. 그래서 그는 '미키 17'이라고 불린다.
'미키 17'은 '미키 16' 이하의 버전들이 그랬듯, 성실하게 일한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왜냐, 그가 '익스펜더블'이 되어 우주로 나가겠다는 것에 사인을 했기 때문이다. 사인을 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니까,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은 없다. 심지어 미키가 우주를 가게 만든 원인인 거액의 빚을 지게 한 그의 친구 티모(스티븐 연)까지도 말이다. 미키를 살게 하는 것은 그의 여자 친구 나샤(나오미 애키)다.
이들은 극단 종교 세력의 자본을 등에 업고 행성 개척단의 선봉에 선 마셜(마크 러팔로), 일파(토니 콜렛) 부부 아래에서 매일을 살아간다. 얼음 행성에서 업무 중인 '미키 17'이 살아있는 줄 모르고 출력된 미키 18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같은 존재가 여러 명이 프린팅된 것을 '멀티플'이라고 하는데, 과거 '멀티플'을 이용해 한 사람은 살인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은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범죄로도 악용된바, 이는 절대 허용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 '미키 18'은 기억 전송 중 발생한 라인 오류 이슈 때문인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졌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인물 같다. 과연 둘은 어떻게 될까.
'미키 17'은 봉준호가 쓰고, 배우들과 스태프와 함께 그린 딥한 어른 동화처럼도 읽힌다. 어른 동화는 복작복작하면서 그 속에 묵혀둔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지 않나. '미키 17'은 우주를 배경으로 아기자기하게 진행된다. 이 이야기는 온 세상이 눈에 덮인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작된다. 눈에 덮이면, 그 전에 것이 무엇이든 일단은 순수해 보이지 않나. 이어 마카롱 가게를 차렸다가 망해서 빚을 지고 우주로 가게 되는 미키와 티모, 매번 뾰루지까지 출력되지 않도록 짜주는 이마 위 뾰루지, 미키가 출력될 때 던지는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동전 놀이, 먹을 것도 없지만 자꾸 개발해 내며 맨 손가락으로 찍어 먹게 되는 일파의 소스 등 아기자기한 봉준호 감독식 어법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아기자기함 속에는 무시무시한 세상이 있다. 아내 '일파'의 허락과 보조 없이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보여주기식인 정치인 '마셜'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과오를 저지를 정치인들의 얼굴을 스쳐 가게 한다. 그리고 인간이 오기 전부터 얼음 행성에 살고 있었던 외계 생물체 '크리퍼'를 대하는 방식과 크리퍼가 자신들을 위협하는 인간에게 항의하는 방식은 과거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을 때 토착민들을 대하는 방식부터 거대한 힘에 조용히 촛불을 든 우리의 모습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분명히 미래의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반복되는 지난 일들이 스쳐 가며 계속해서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답게, 제대로, 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전작처럼, 우주 배경의 영화 '미키 17'에서도 사람이 사는 세상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외계 행성으로 향한 사람의 모습에, 지난 과거와 현재가 더 선명하게 담긴다. ‘기생충’에서 문광(이정은)이 초인종을 누르며 장르가 바뀌었듯, 출력된 지 얼마 안 된 미키 18이 누워있는 자기 방문을 미키 17이 열어젖혔을 때, 흐름은 달리 흐른다. 하지만 장르 자체가 바뀐 것 같았던 ‘기생충’ 때와는 또 달리, ‘미키 17’은 자신만의 호흡을 놓지 않는다.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우리의 미키 17은 여전히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 원작인 에드워드 애슈턴의 SF 소설 '미키 7'이 던지는 기술적이고 윤리적인 질문 대신, '미키 17'에서는 미키와 나샤의 사랑을 중심축으로 세우고 로맨틱 코미디 같은 마카롱같이 달콤한 계단들을 쌓아 올린다. 두 사람은 그 계단을 함께 오르고 내려간다.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 속 인물 어느 한 명도, 심지어 크리쳐들까지 허투루 두지 않는다. 지구의 축소판 같은 행성 개척단에는 다채로운 인종으로 채워져 있고, 그 안과 밖의 살아있는 것들은 그들 각자의 동력이 있고, 계획이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미키 17'과 '미키 18'이라는 숫자가 지닌 의미에 대해 "성인이 되는 18세"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아마도, '미키 17'은 '기생충'에서 처럼 오를 수 없는 계단이 아닌, 내일도 모래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우리를 응원하기 위한, 봉준호 감독의 응원 버튼처럼도 느껴진다. 험난한 세상을 포기하지 말고, 안주하지 말고, 인간답게 잘 살아가자고!
'미키 17'을 본 박찬욱 감독의 "아카데미 위원회는 로버트 패틴슨에게 주연상과 조연상 두 개를 주어라!"라는 한 줄 평처럼 완전히 다른 질감의 '미키 17'과 '미키 18'은 로버트 패틴슨으로 완성됐다. 모든 배우의 얼굴이 선명하게 지나가지만, 특히 마크 러팔로와 토니 콜렛 부부의 저녁 만찬 중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은 가장 아프게 웃겼던 장면으로 꼽고 싶다. 여러모로 살아있음에 행복해지는 137분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2월 2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