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율같은 현장성, '변요한'을 만들다 [인터뷰]
"삶이 뭐라고 생각해요? 거창한 질문 같아요? 간단해요. 선택의 순간들을 모아두면 그게 삶이고 인생이 되는 거야.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
tvN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율(변요한)이 장그래(임시완)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영화 '그녀가 죽었다' 속 변요한이 맡은 캐릭터 구정태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구정태는 공인중개사다. 고객이 맡긴 열쇠로 그 집에 들어가 타인의 삶을 살짝 엿보고 사소한 물건을 기념품으로 챙겨 나오는 악취미를 가진 인물이다. 타인의 삶을 몰래 훔쳐보던 중,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를 발견하고 그의 삶에 엮여 들어가게 된다. 그는 누군가를 훔쳐보는 삶을 선택한 삶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보통 영화의 인물들은 선과 악이라는 절대 축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녀가 죽었다'는 그런 축으로 인물을 나뉠 수 없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 두 사람, 구정태와 한소라가 모두 비정상적인 인물로 비치기 때문이다. 변요한은 그런 지점에서 '그녀가 죽었다'라는 작품에 매력을 느꼈다.
"처음에 '자산어보' PD님께서 대본을 주셨어요. '정의롭지 않고,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있다'라고 하셨어요. 봤더니 변태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두 번을 읽었어요. 저에겐 답이 딱 나왔어요. 저에게 '그녀가 죽었다'는 '세상이 나에게 맞춰야 하는가, 내가 세상에 맞춰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작품이었어요. 정태는 세상에 맞추는 사람이고, 소라는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사람이었죠. 그것만으로도 흥미로웠어요."
'그녀가 죽었다'는 크게 두 가지 결로 흘러간다. 겉으로 보는 행동, 그리고 내레이션으로 그 인물의 속마음을 들으며 보이는 행동이다. 변요한이 표현한 대로 "결국에는 변태"인 인물의 행동에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동기화되려고 했다. 극 중 구정태가 집 안에서 안구세정제를 사용하는 모습도, 그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장면이었다.
"딱 맞아떨어지려고 하는 게 재미였던 것 같아요. 분명히 비정상적인 사람인데 관객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 잘못되면 어쩌지'라는 우려가 들게 하는 게 목표였거든요. 시나리오 읽을 때부터 그랬어요. 어느 순간부터 구정태의 내레이션이 없어지거든요. 김세휘 감독님의 영리함이 시나리오에 담겨있던 것 같아요. 전 감독님을 천재라고 불렀거든요. 감독님은 굉장한 집중력으로 현장에서 어느 한쪽도 편협하게 바라보시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다른 결로 흘러가는 작품을 맛깔나게 살려준 것은 변요한이 보여주는 구정태의 행동과 그 속의 속내가 맞아떨어지면서였다. 변요한은 내레이션을 위해 목소리 톤부터 행동, 그리고 타이밍까지 다양한 지점에서 고민했다.
"대본을 받고 시작하려니, 이 작품은 첫인상이 아닌 끝 인상이 남는 작품이더라고요. 처음에는 평범하게 시작해, 점점 변태도 되고, 결국 범죄자가 되는데요. 연기를 할 때 먼저 나쁘게 시작하게 되더라고요. '그러지 말자'라고 생각하고 들어가니 중간 지점인 '변태'가 나오고요. 평범하게 시작해야 하는데 제 안에서 오류가 걸린 거죠. 내레이션까지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분석도 열심히 했고, 정말 수학적으로 접근했어요."
"대본을 볼 때는 재미있게 따라갔는데, 내레이션이 나올 때, 구정태의 움직임에 어떻게 생명력을 불어넣을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서브 텍스트라고 생각하고, 목소리로 내는 내레이션과 나눠서 생각한 것 같아요. 정확하게 내레이션이 들어올 때의 타이밍을 계산하며 연기했어요. 목소리도 여러 가지 톤을 내보면서 감독님과 상의하에 결정했어요. 그 지점이 재미있었어요. 결국 배우에겐 모든 게 도구잖아요. 그 도구들을 규정짓지 않고 충분히 활용한다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눈살을 찌푸리고,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고 싶었던 구정태에게 한 걸음 다가서게 한 장면이 있다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골함을 끌어안은 장면이 아닐까. 눈물을 뚝 떨구는 그 타이밍까지 의도한 지점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저는 굉장히 테이크에 쫓기던 사람이었어요. 선배님들과 연기를 하면서 늘 첫 테이크, 혹은 두 번째 테이크에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야지 많은 스태프, 동료 등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 테이크도 두 테이크에 끝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NG는 내라고 NG인 것 같아요. NG를 활용하는 좋은 지점도 있는 것 같아요. 살아있고, 아름다운 순간도 담기더라고요. 40대가 되어가니 이제야 아는 것 같아요. 오히려 NG를 사용하는 감독님들도 있으시고요. 그냥 다양한 현장과 스타일 속에서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살아가며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오늘은 뭘 먹을까?'라는 작은 선택부터 '어떤 작품에 임할까?'라는 커다란 선택까지, 매 순간의 선택이 '변요한'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변요한은 다음 선택을 하는 원동력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해나가는 질문을, 꼭 지켜나가려는 진심을 꼽는다.
"저는 매일매일 돌아봐요. 물론 어떤 날은 그러지 못하는 날도 있죠. 작업적으로 봤을 때도 '오늘 뭘 했나'를 빨리 체크해야 다음 진도로 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진짜 질문을 많이 하는 배우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허락받고, 새벽에도 전화하고,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전화하기도 했어요. 저는 그게 제가 마법에 걸리는 시간 같아요. 작품 속 그 세계관에 들어가서 그 캐릭터를 얻기에 사실 저는 너무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시선에 갇히지 않고, 모든 캐릭터를 잘 얻고 싶은 마음이 있죠. 그런 노력이 대중들에게 잘 닿기를 바라요. 어떤 역할이든 정말 진심으로 하고 싶습니다."
"저는 너무나 훌륭한 선배님들과 운 좋게도 함께한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또 무서울 정도로 강한 후배들과도 많이 만났고요. 저는 한석율('미생' 속 변요한이 맡은 캐릭터)처럼 현장에서 숨 쉬는 게 좋아요. 연차가 10년이 지났지만, 앞으로 배울 게 더 많을 것 같아요.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은 것 같고요. 현장에서 다 같이 한 작품을 사랑하고, 그 목표를 향해 으샤으샤 하는 그 공기가 좋아요."
변요한은 오늘(15일) 영화 '그녀가 죽었다'와 함께 디즈니+ 시리즈 '삼식이 삼촌'으로도 시청자와 만난다. 바야흐로 '변요한'의 새로운 장이다.
"두 작품 속 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거예요. 공교롭게도 같은 날 관객분들과 시청자분들과 함께 만나게 됐는데요. 저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아요. 사실 그분들을 만나기 위해 작품을 만든 거잖아요. 세상에 작품들이 나올 수 있게 돼 너무 감사하고요. 하루하루가 귀한 것 같아요. 관객분들에게 닿을 때까지의 그 과정이 제가 일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