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예산, 현명하게 쓰는 방법
한국공학한림원, 올바른 R&D 방향 모색
핵심 원천기술 확보 중요… “산업기술 R&D 강화해야”
수요기업 의견 반영 필요, 나눠먹기식 투자 문제
정부의 2025년 연구개발(R&D) 예산 전략이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정부의 R&D 투자가 올바르게 되지 않고 있단 비판이 나왔다. 정부 예산이 필요한 곳에 쓰이지 않고, 형평성을 맞추기 위한 나눠먹기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보고서와 같은 행정업무 등에 불필요한 인력과 비용이 많이 사용된단 지적이 제기됐다. 또 시대에 어긋난 예산 집행이 많고, 과제를 심사하는 이들의 전문성도 떨어져 올바른 투자가 되지 않고 있단 주장도 나왔다.
한국공학한림원은 2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에서 ‘선도형 혁신 생태계 육성을 위한 산업·기업 R&D 지원방향’에 관한 포럼을 열고 정부의 R&D 예산 전략의 변화를 촉구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로봇 등 첨단 산업 분야 관계자와 학계, 연구계 관계자들이 모인 이번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정부 R&D 예산이 국가 산업 성장의 기반이 되는 중요 요소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단, 효과적으로 산업 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예산 전략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 산업기술 R&D, 국가 기술 패권의 ‘게임체인저’
이날 공통으로 제기된 의견은 ‘산업기술 R&D’다. 이들은 산업과 기업에 R&D 비용을 늘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병헌 광운대 교수는 “정부 역할은 대학 기초연구나 기업이 수행하지 못하는 공공기술 등에 집중하고, 기업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며 “4차 산업혁명 이후 기업과 기업들도 기초연구와 같은 원천 기술 개발에 투자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반대로 대학과 연구소는 대규모 연구시설과 데이터를 활용하지 않으면 기초연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므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 주도로 산업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미국조차도 기업과 산업 R&D에 관한 정부 투자를 높이는 상황이고 미국, 중국, 독일 등의 국가도 마찬가지”라며 “최근 국가별로 기술 패권이 본격화한 상황에서 기존 관념에만 사로잡혀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안준모 고려대 교수도 의견을 같이했다. AI나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 기술은 게임체인저가 돼야 시장을 독식할 수 있으므로 기존 기초, 응용, 개발·사업화 등으로 R&D를 나누지 않고 통합적인 시선으로 봐야 한다고 촉구했다. 안 교수는 “과거에는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사업화 등이 단계별로 이뤄졌다면, 지금은 이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글로벌 기업이나 선도적 기업일수록 핵심적인 원천 기술에 관심이 높으므로 산업기술 R&D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기업들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산업기술 R&D 비용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박성빈 LG에너지솔루션 기술전략담당은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므로 원천기술 확보에 투자하기 어려워 이 분야에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은 정부 주도로 집중 투자가 이뤄지면서 한국의 기술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면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원천 기술 확보가 필요한데 기업이 투자하긴 리스크가 높으므로 정부가 지원하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또 “전고체 전지와 같은 차세대 전지 기술은 국가 경쟁력과도 연관되므로 기술 확보하기 위하 산학연이 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AI 이노베이션 센터장은 “AI의 경우 R&D 핵심 역할을 하는 곳은 바로 기업”이라며 “산업에 중단기 임팩트를 바로 이끌 수 있는 곳은 기업이므로 기업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전체적인 정부 R&D 투자 방향을 바꾸기 위해선 과제 선발 평가체계부터 제대로 바꿔야 한다”며 “한 번에 변화가 어려우면 수월성이 필요한 곳과 형평성이 중요한 곳을 정확히 분리해 특정 영역부터 변화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수요 없는 R&D, 나눠먹기식 투자… 부정 결과 초래
지금까지 진행됐던 국가 R&D 투자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수요기업의 의견이 과제에 반영되지 않고, 부처별로 성장동력이 자주 변화해 시장에 혼선이 자주 발생하는 문제 등이 거론됐다.
이동수 네이버클라우드 하이퍼스케일AI 담당 이사는 현재 R&D 투자가 수요처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있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그 사례로 AI 반도체를 들었다. 이 이사는 “현재 이 분야를 전공한 저조차 3세대, 4세대 AI 반도체에 해당하는 기술을 쉽게 예상하기 힘들다”면서 “실제로 AI 서비스가 어떻게 변화할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마치 정부가 주도적으로 기획해 민간이 이러한 사업을 한다고 떠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학교나 연구기관에서는 원천 기술에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것이 맞지만, 수요기업 입장에서 해당 칩을 써야 한다거나 그런 과제의 수요를 짊어지게끔 부담을 줄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수요처의 의견을 듣지 않고 일방적인 공급과 기술개발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는 “오히려 해외 기업인 인텔에 수요기업으로서의 의견을 전달했더니 펫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만나자고 요청하고 변화가 필요하면 모든 지원을 다 해주겠다고 해서 공동연구소를 설립하게 됐다”며 “왜 이런 이야기를 인텔과 해야 할까, 우리 정부나 관계자들이 도와주고 과감한 결정을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그는 수요기업 관계자로서 정부에 의견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현재 회사의 AI 기술 전략담당임에도 정부 회의에 초대받은 적이 없다”며 “네이버클라우드 말고도 KT 클라우드, SK텔레콤, LG AI연구원 등 훌륭한 회사가 많은데, 일부 대표가 참여하는 회의 말고 이들이 초대되는 것도 본 적 없다”고 아쉬워했다.
양현모 전략컨설팅집현 대표는 국가 R&D에서 정부가 중심을 올바르게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판단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투자 전략의 일관성을 둬야 하는데, 정부와 부처별로 분산 추진돼 효과가 적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기존 추격형 산업 R&D는 많은 개발도상국이 벤치마킹할 정도로 성공했지만, 이젠 선도형 퍼스트무버로 가야할 때”라며 “새로우 성장동력을 창출하려면 정부가 성장동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일관성 있는 방향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투자 방향이 기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부 예산이 필요한 곳에 쓰이지 않고, 형평성을 맞추기 위한 나눠먹기 위주로 되고 있단 지적이다. 황보제민 KAIST 교수는 “정부 과제가 나눠먹기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각 과제를 평가하는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이 부족한 것은 큰 문제”라며 “비전문가들에 의한 평가는 국가 비용 낭비와 R&D 성장 기회를 망치는 길”이라고 비난했다. 또 그는 정부 과제의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정부 과제로 도움을 받는 것은 분명 있지만, 1억 원 과제라고 하면 보고서를 쓸 인력과 사업 집행을 관리하는 비용에 해당 비용이 다 든다”며 “비용에 맞춰 효율적으로 정부 과제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번 포럼에선 기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초, 응용, 개발 R&D부터 실증 사업까지 연계하는 통합형 R&D을 구축하는 방법과, 불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줄이기 위한 투자 연계형 R&D 등 다양한 해결책이 모색됐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R&D에 강점이 있는 것을 믿고, 지속적인 정책 고도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에 무게가 실렸다.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기업인 퓨리오사AI의 백준호 대표는 “우리 제품이 선도형 제품을 성장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R&D에 집중하고 관련 정책을 고도화해 나간다면 비단 AI 반도체뿐 아니라 많은 선도형 제품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