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중기, '트리거'로 완성한 죄책감의 얼굴…'로기완' [인터뷰]
여전히 송중기라는 이름에는 맑음이 담겨있다. '성균관 스캔들'에서 환하게 웃었던 구용화에 그랬고, 심지어 마피아 변호사 '빈센조' 속 그에게도 웃음이 남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송중기는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영화 '화란'에서 비겁함을 담아냈다는 송중기는 영화 '로기완'에서는 "죄책감"의 얼굴을 꺼냈다.
영화 '로기완'은 탈북자 로기완이 마지막 희망을 안고 도착한 벨기에에서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여자 마리(최성은)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로기완은 자기 때문에 벌어진 엄마(김성령)의 죽음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리고 "살아남아라"라는 엄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힘든 발걸음을 떼고 뚜벅뚜벅 걸어가며 낯선 벨기에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지위를 얻으려는 인물이다. 송중기는 7년 전 '로기완'의 제안을 받았지만, 로기완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워 고사했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을 찾아온 시나리오를 보며, 출연을 결정했다. 7년이라는 시간은 송중기에게 '로기완'을 향한 공감의 문을 열어줬다.
Q. 7년 전, '로기완'의 제안을 고사했었지만, 다시 돌아온 '로기완'에 출연을 결정했다. 이유가 있을까.
"과거의 저는 기완이와 마리의 사랑 이야기가 공감이 되지 않았어요. 제가 겸손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제가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기완이가 사랑 타령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재벌집 막내 아들' 후반부를 찍을 때쯤 넷플릭스 관계자분께 전화를 받았어요. "'로기완' 시나리오 보셨어요?'라고요. 넷플릭스에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로기완'이 엄마의 '잘 살아남아라'라는 말에 다가서는 이야기인데, 잘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결국 저에게 잘 사는 건 여자든, 친구든, 가족이든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더라고요. 예전에는 '로기완에게 사랑은 사치 아닌가요? '레버넌트' 같이 살아남아야죠'라고 했는데요." (웃음)
Q. 김희진 감독님과 본인이 생각한 '로기완'의 차이가 있었나. 맞춰가는 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희진 감독님이 작가로도 활약을 하셨고요. 당연히 감독님의 색이 물씬 들어갔죠. '김희진스럽다'라는 말이 맞을 거예요. 예를 들어, 격양되는 감정을 연기했는데 감독님께서 '마지막 대사 끝나고 씨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기완이는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에요'라고 하셨어요. 정말 차분하고 홀리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런 색이 세세하게 들어가 꼿꼿한 느낌의 기완이를 완성하지 않았나 싶어요. 저도 한 퓨어(PURE) 하긴 하는데요. (웃음) 그 갭이 있을 거예요. '로기완'의 판권을 구입하고 영화화되는 과정을 지켜봐 온 제작사 용필름 대표님께서는 로기완이 저를 만나 더 뜨거워졌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아직 부족하지만, 그런 지점에서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Q. 직접 아이디어를 낸 지점이 있을까.
"제가 계속 해결이 안 되는 감정이 있었어요. 그래서 로기완이 마리(최성은)에게든, 하늘에 계신 엄마에게든,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내가 따뜻한 곳에서 이불 덮고 잘 가치가 있는 놈인가, 행복할 자격이 있는 놈인가'라는 걸 물어봐야 할 것 같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마리와 그런 대화하는 장면이 만들어졌어요. 그런 식의 작업 방식이 있었어요. 감독님께서는 누구의 말도 흘려듣지 않고 귀담아들으세요. 그 장면에 로기완의 감정을 대사로 버무려주셨어요. 그런 지점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Q. 김희진 감독님께서는 '작품을 위해 대역이 있었음에도 송중기가 스스로 입수했다'라고 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추운 거 빼고는 위험하지 않았어요. 제작진들이 배우 예쁘게 하려고 많이 꾸며주시는데요. 별거 아니었어요.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였고, 빨리 들어가야 빨리 끝나니까요. 그냥 한 번에 그랬죠. (웃음)"
Q. '로기완' 촬영 당시 임신 중인 아내가 동행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중요한 시기였던 만큼, 조심스럽고 힘든 지점도 있었을 것 같다.
"지금도 중요하고, 그때도 중요했고요. 항상 중요한 것 같아요. 그때 아내가 임신 중이라 당연히 몸조심해야 했지만, 사실 마음가짐을 더 좋게 하려고 한 것 같아요. 위험한 지점은 없었어요. 해외 올 로케이션이라 변수가 많아서 쉽지 않았죠. 제일 속상한 건 원래 엔딩장면을 터키에서 찍으려고 했거든요.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로기완이 나중에는 자유 의지로 자신이 살아갈 땅으로 떠난다는 것이 감독님이 '로기완'에 담은 대전제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중간에 사랑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거고요. 그 연장선상에서 엔딩장면을 터키 카파도키아로 잡았어요. 열기구로 유명한 도시였고, 새로운 전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런데 촬영 직전 터키에 크게 지진이 났어요. 지진이 난 곳에 대중 영화를 찍으러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런 게 큰 변수였죠."
Q. 로기완은 무릎을 꿇고 돌아가신 엄마(김성령)의 사고 현장에 남아있는 피를 닦아낸다. 그 처연한 표정이 뇌리에 깊게 남더라. 경험한 법 없는 감정에 다가서는 자신의 방법이 있을까.
"저는 트리거를 찾는 편인데요. 감사하게도 현장에서 찾아졌어요. 트리거만 찾으면, 슬픈 장면도 즐겁게 찍을 수 있어요. 시나리오에는 '피를 닦는다, 운다' 정도만 있었어요.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그 길이 경사가 져 있어서 물로 닦아내면 피가 하수 구멍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아들이 엄마를 그리워하는 정서'는 사실 보편적이잖아요. 그런 보편적인 정서를 우는 것으로만 표현하면 단편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는데, 경사가 져서 흐르는 물이 슬픔을 더해준 것 같아요. 이래서 연출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어요. 그리고 그 앵글 속에는 조명 감독님이 더해준 피의 콘트라스트, 미술감독님이 쌓아둔 눈으로 인한 흰색과 빨간색의 대비 등이 더해져 마법 같은 순간이 완성된 것 같아요."
Q. 트리거가 발견되는 현장이라면 늘 너무나 좋겠지만, 사실 그런 상황이 없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러면 어떻게 감정을 찾아가나.
"제가 2008년 주말드라마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선생님들을 많이 뵐 수 있었거든요. 나문희 선생님께서 저희 엄마 역할이셨는데요. 평생 죽은 줄 알았던 엄마가 내 눈앞에 나타나는 장면이 있었어요. 한 달 동안 잠을 못 잔 것 같아요. 머릿 속에서 별에 별 생각을 다 해봐도 안 되더라고요. 그때 선생님들께서 해주신 말씀이 '트리거를 찾아봐' 였어요. '나도 머릿속에서 사랑하는 친구도, 가족도 다 죽는 상상 해봤다'고 하시면서요. 그때 그 말씀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없으면 안 돼요. 찾아야 해요. 가끔 정말 안 보일 때가 있거든요. 그럼 신기하게 상대 배우가 되어주기도 해요. 제가 그런 상대 배우가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배우는 평생을 해도 건방져질 수 없는 직업 같아요. 결론은 없으면 안 됩니다. (웃음)"
Q. 영화 '화란'을 비겁함이라고 이야기했고, '로기완'을 죄책감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보여주고 싶은 송중기의 얼굴이 있을까.
"저는 역할보다 장르 욕심이 많은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호러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요. 그러면 시나리오 제안이 올 줄 알았는데, 안 오더라고요. 그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호러라는 장르가 흥행이 잘 안되는 장르라서 기획이 잘 안되는건지, 투자가 잘 안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더더욱 '파묘'의 흥행에 기분이 좋더라고요. '거 봐, 이런 장르 도전해야 한다니까'라고 생각한 제 생각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웃음) 저는 장재현 감독님도 잘 모르거든요. 하지만 너무 기분이 좋아요."
Q. 인터뷰에서 영화와 드라마의 균형을 맞춰가는 편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다음 작품은 '드라마'로 예상해도 될까.
"저는 (김)고은 씨도 너무 좋아하는 배우거든요. 그 배우가 한 말 중에 '신인 때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성장하고 싶어서 좋은 선배들이 나오는 작품이었다'라는 말이 굉장히 멋있고, 인상깊었어요. 또 (김)고은 씨 다운 생각인 것 같고요. 비슷한 지점인 것 같아요. 저는 나이는 먹었지만, 경험이 많은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경험을 쌓고, 성장하고 싶어요. 한계를 두지 않고, 도전하고 싶습니다. 시나리오만 좋으면, 드라마, 영화 뭐든 가리지 않고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Q. 과거 한 부분에서는 단호하게 자신을 표현해 온 모습과는 달라진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뭔가 스스로 변화의 지점이 있었을까.
"손하트 관련해서는 그걸 하기 싫은 게 아니고, 획일적인 제스쳐가 재미없지 않냐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태도가 불편하게 비쳤다면, 제 잘못인 것 같아요. 남 탓을 하기보다는 저를 돌아보는 편이라서요. 바꿔야 할 지점은 바꿔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아마 모든 부모님들이 비슷할 거예요. 아이를 낳고 달리 생각한 지점이라면 '이 아이에게 나중에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말자, 그런 모습은 보여주지 말자'라는 것 같아요. 거창한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입니다. (웃음)"
더 단단해졌고, 부드러워졌다. 맺고 끊는 곧음이 있던 자리에 유연함이 더해졌다. 그 유연함의 자리에 다양한 도전을 통해 보여줄 송중기의 새로운 얼굴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