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얼음탕부터 열탕까지…몰입의 '힘쎈배우 김해숙'
떨렸다. 2023년 재미있게 본 작품을 떠올려보면, 모두 김해숙이 있었다. '악귀'에서 돈을 위해 남편과 자식까지 떠나보낸 비정한 엄마 나병희였고, '힘쎈여자 강남순'에서 괴력의 엄마 길중간이 됐다. 그리고 영화 '3일의 휴가'에서는 딸 진주가 사무치는 엄마 복자가 됐다. 같은 엄마였고,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선과 악을 넘어 히어로까지 진폭이 큰 캐릭터 나병희, 길중간, 복자는 김해숙을 만나 모두 그 모습 그 자체가 됐다.
지난 6일 개봉한 영화 '3일의 휴가'는 죽은 지 3년째 되는 날, 하늘에서 3일간의 휴가를 얻어 딸 진주(신민아)를 보러 온 엄마 복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복자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진주를 홀로 키웠다. 그런 진주가 미국 UCLA 대학에서 교수가 된다는 소식이 복자의 모든 자랑이었다. 하지만, 복자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딸과 이별하게 됐다. 딸을 만나러 세상에 왔을 때, 당연히 미국으로 갈 줄 알았는데, 마주한 것은 자신이 떠난 시골집에서 백반집을 운영하는 딸 진주의 모습이었다.
Q. '3일의 휴가' 시사회 내내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캐스팅되고 가장 고민했던 지점이 있을까.
"제목만 듣고,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슬플 거라 예상하지 않나. 그냥 엄마도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엄마니까 잘못하면 '구태의연하다'라는 소리를 들을 까봐 준비 기간부터 굉장히 어려웠다. 잘 못 풀어내면 '작정하고 울리려고 한다'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가깝지만, 또 각자의 엄청난 이야기들을 품고 있지 않나. 그것들을 사심 없이 풀어가다 보면 괜찮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가 왜 내려왔을까, 무엇을 가장 힘들어했을까'라는 질문부터 시작했다. 시골집에서 백반집을 운영하는 딸을 보면 화가 날 것 같고, 볼 때마다 속상할 것 같았다. 거기에 시점을 잡아서 연기했다. 가족끼리 가까워서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당시 서운한 걸 풀지 않으면 쌓여간다. 그걸 풀어가는 과정에서는 감정에 따라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Q. 이렇게 희생적이고 따뜻한 엄마의 이미지는 또 오랜만인 것 같다.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엄마' 외에는 많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운 좋게 제가 맡은 엄마들은 기존에 보여준 '엄마'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많았다. 저도 배우로서 갈증이 있는 시기도 있었는데, 사실 '엄마'에도 정말 여러 가지 엄마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해바라기'에서 사형수를 아들로 삼기도 하고, 또 소매치기였던 엄마를 했던 적도 있다. 이걸로 내 갈증을 풀어도 되겠다 싶었다. 그동안 여러 캐릭터를 하면서, 배우로서 원하는 대로 갈증은 해소가 됐는데, '3일의 휴가'는 각별했다. 다들 바쁘게 살지 않나. 그러면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지나치기도 한다. 저도 사실 부모님께 '고마워, 사랑해, 미안해'라는 말을 못 해본 것 같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이 영화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임했다."
Q. '3일의 휴가'에는 그래서인지 진주와 김치찌개를 먹는 장면이나, 마지막 장면 등 유독 엄마의 얼굴을 한 김해숙의 표정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당시 어떻게 임했나.
"저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이 있으면, 가짜로 하지는 못한다. NG를 낸다. 그래서 감정 장면이 있을 때는 정말 누가 와서 건드리는 것도 싫어한다. 어찌 보면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배우의 마음을 가장 그대로 가져가는 장면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더 초집중하고 임한다. 제 캐릭터의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따지자면, 그것이 전달된 것 같다. 마지막 장면 촬영할 때는 모두 감정이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다 한 번에 간 것 같다. 배우들은 매번 좋은 장면을 위해 노력하지만, 개인적으로 감정 장면 만큼은 유독 첫 장면이 제일 좋더라. 좋은 감정이 담긴 것 같다."
Q.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가 된다. 스스로 어떤 엄마였나.
"저희 시대에는 여자가 24살 이후 결혼하면, '올드 미스'였다. 그래서 엄마들이 어떻게 하든지 24살 전에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24살이면 한창 놀 나이 아니냐. 아무것도 모르고 24살에 결혼해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살림하고 있더라. 저는 25살, 26살 때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때 뭘 알았겠냐. 그래도 자식이니까 제시간에 일어나 우유 먹이고, 기저귀 빨고, 다 하고 있더라. 아이들이 6살 때쯤부터 저도 어머님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잘 커 줘서 감사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면도 있다.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못 맡기겠어도 엄마에게는 맡기지 않나. 저도 누군가의 딸이었을 때는 철이 없었고, 엄마가 됐을 때는 우리 엄마랑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더라."
Q. 진주가 복자에 대한 그리움을 엄마의 요리법을 찾아가며 드러내듯, 그리운 엄마의 음식이 있나.
"결국 집밥이 먹고 싶은 건, 엄마의 사랑이 그리운 것 같다. 엄마의 집밥은 어디에서도 그 맛을 낼 수가 없는 것 같다. 고로 그게 사랑인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9년 정도 됐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생각나는 엄마 요리가 있다. 찾아봐도 없고, 사먹어도 그 맛이 안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엄마가 나를 맛있게 먹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빠져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최근 생각했다."
Q. 앞서 엄마 캐릭터와 관련해 배우로서의 욕심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시청자와 관객 입장에서 이렇게 다른 캐릭터를 어떻게 그 캐릭터처럼 표현하는지 궁금했다. 몰입하는 방법이 있나.
"배우는 캐릭터를 맡으면 그 이전 모습이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사람이니 어느 정도 비슷할 수는 있지만, 그 역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캐릭터를 보고 정리를 하다 보면 '이 인물은 어떤 인물'이라고 캐치가 되는 지점이 있다. 거기에서부터 맞춰가는 거다. 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니, 헤어스타일부터 모든 의상을 맞춰서 고민한다. '악귀' 때는 제 사비로 특수 분장을 불렀다. 노역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머리는 하얀데 얼굴이 어설프게 나오는 게 걸리더라.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Q. 1974년에 데뷔해, 배우로 50여 년을 살아왔다. 지금 돌아볼 때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나.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행복했다. 많이 불러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3일의 휴가'도 많이 봐주시면 좋겠다. 요즘 너무나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냐. '3일의 휴가'를 보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따뜻함을 느끼면 좋겠다. 벌써 내년이면 제 배우 인생 50주년이라고 하시는데, 배우 인생 49주년에 '3일의 휴가'라는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난 게 제 행복이 아닐까 싶다. '3일의 휴가'가 여태까지 한 엄마의 가족 드라마 중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