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없는 중동의 내일엔 韓 AI가 있다
디지털 주목하는 중동, 한국 기업엔 기회
“당장 이익 창출보단 상생하는 전략 필요”
“약 107조 원 규모의 거대한 운동장이 중동 지역에 만들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순방 성과에 관해 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21~26일 중동 2개국을 방문해 총 202억 달러(약 27조 원) 규모의 양해각서(MOU)와 계약을 체결했다. 작년 말 사우디 모하메드 왕세자 방한 시 체결한 290억 달러 규모 MOU와 올해 초 UAE 국빈 방문 시 발표한 300억 달러 투자 약속을 합치면 총 792억 달러(약 107조 원) 경제 운동장이 만들어졌단 뜻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올해 초 UAE 국빈 방문에 이어 중동 빅3 국가와의 정상외교를 완성했다”며 “저와 동행한 130여 명의 경제사절단은 사우디와 카타르에서 총 202억 달러 규모 63개의 MOU와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외의존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국은 기업이 뛸 수 있는 경제 운동장을 확장하면서 5000만 시장에서 5억, 50억의 시장으로 시장을 넓혀 성장 동력을 찾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내야한다”고 강조했다.
중동은 사실 한국에 있어선 기회의 땅이다. 한국 강점인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디지털 전환에 관심이 높아서다. 중동은 1908년 페르시아 사막에서 석유를 처음 발견 이후 산유국으로서의 경쟁력을 키워왔다. 일명 ‘오일 머니’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했다. 하지만 현재 석유의 가치는 지속 떨어지는 추세다. 미국은 중동산 석유를 대체할 ‘셰일 석유’를 발견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 중동 시장에 위협을 주고 있고, 세계적으로 환경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석유를 대체할 친환경 에너지에 관심이 높아졌다. 석유는 물론 석유 기업에 대한 평판은 부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중동은 석유 없는 내일을 위해 ICT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오일 경제에서 ICT 경제로 도약하려는 움직임이 정책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일부 중동 국가 정부는 공공, 의료, 교육, 물류 등 각 분야에서 디지털 전환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인력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30세 미만 청년 인구가 많은 만큼, AI와 같은 최신 IT 기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중이다. 2019년부터 중동에서 클라우드 인프라 관리 서비스를 제공해 온 국내 클라우드 관리·서비스 기업 베스핀글로벌 관계자는 “현재 중동은 정책적으로 디지털 전환에 관한 수요가 높다”며 “실제 현지에서는 기술과 인력 양성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인프라 구축부터 생성형 AI까지 중동 시장 공략
떠오르는 중동 ICT 시장을 노리고 있는 곳은 많다. 특히 최근 화두인 인공지능(AI) 관련 기업들은 중동 시장에 깃발을 꽂기 위해 선제적으로 나서고 있다. AI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은 반도체와 클라우드 등 인프라 기술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 최근에는 생성형 AI 등 실제 AI 기술을 공급하는 기업들이 많아졌다. 중동 IT 기업은 이를 토대로 자체 대형언어모델(LLM)을 만들거나 해외 기술을 자사 서비스에 접목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은 챗GPT 개발사인 오픈AI다. 이 회사는 이달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G42와 파트너십을 맺고 AI 채택을 촉진하겠다고 발표했다. G42는 아부다비 정부가 세운 데이터·클라우드 기반 IT 회사다. 지난 5월 아랍권 처음으로 대형언어모델(LLM) ‘팰컨 40B’를 오픈소스로 공개했고, 8월에는 아랍어를 학습한 LLM ‘자이스’를 선보였다. G42는 오픈AI와의 파트너십 체결로 헬스케어, 금융 등의 사업에 AI 기술을 적극 사용한다는 방침이다.
미국 기업들은 중동 AI 발전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도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빅테크 기업으로 평가되는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 9월 G42와 중동 지역 대규모 클라우드 거점 구축을 위한 사업 협력안을 발표했다. 디지털 전환과 AI 사용의 기반이 되는 클라우드를 구축해 중동 지역의 디지털 혁신을 이끈다는 계획이다.
AI 반도체 기업도 있다. 반도체 기업 중 가장 큰 크기의 반도체를 만든다는 실리콘밸리의 ‘세레브라스’다. 이 기업은 G42에 대규모 AI 연산에 필요한 슈퍼컴퓨터 칩을 공급했다. 계약 금액은 1억 달러(약 1350억 원) 규모다. 이 기업은 G42의 슈퍼컴퓨터 추가 구축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동 지역에 깃발 꽂은 韓 기업, “동반 성장 중요”
한국 기업들도 중동 시장 선점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베스핀글로벌은 4년 전 일찍이 중동 현지에 깃발을 꽂은 상태다. 아부다비 최초로 클라우드 운영센터와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클라우드 운영뿐 아니라 직원 교육까지 진행하고 있다. 중동 오피스도 지난해 두바이에서 아부다비로 확장 이전한 상태다. 베스핀글로벌 관계자는 “아부다비뿐 아니라 두바이, 사우디아라비아 수도인 리야드에서 현지 디지털 전환을 돕고 있다”며 “지난 16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왕립과학기술원(KACST)에서 미래기술 파트너십 포럼에 참여해 AI, 클라우드, 디지털 인프라, 스마트시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지털 사회 공동 구축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네이버도 중동 시작 공략에 나섰다. 지난 24일 사우디 리야드 네옴 전시관에서 열린 ‘한-사우디 건설협력 50주년 기념식’에서 사우디 주택부와 약 1억 달러 이상 규모의 디지털 트윈 플랫폼 구축 프로젝트를 수주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정부 주관 ‘원팀 코리아’ 사우디 수주 지원단에 합류한 지 1년도 안 돼 거둔 성과다.
네이버는 이번 수주로 이르면 내년부터 5년간 리야드와 메디나, 제다, 담맘, 메카 등 5개 도시를 대상으로 클라우드 기반의 3D 디지털 모델링 디지털 트윈 플랫폼을 구축·운영한다. 작게는 건물 내부 공간에서 크게는 도시 전체까지 데이터화 해 정밀한 공간 정보를 구축하게 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플랫폼을 도시 계획과 모니터링, 홍수 예측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네이버는 이번 사업을 계기로 사우디아라비아에 현지 법인을 설립해 중동 지역 클라우드 리전 구축 등의 사업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네이버의 초거대 AI와 클라우드 기술도 수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네이버 관계자는 “우리는 초대규모 AI 기술뿐 아니라 도심 단위 정밀 디지털 트윈 기술과 매핑 장비, 클라우드 기반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다”며 “이 같은 기술은 모두 자체 기술력으로 사우디 등 중동 지역에 응용 접목할 수 있어 경쟁력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중동 지역 인프라 구축뿐 아니라 실제 서비스 영역에서의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UAE 소재 메디컬 유통 기업 ‘MHC’와 의료 진단 AI 솔루션 9개 제품의 공급 계약을 체결한 ‘코어라인소프트’가 대표 사례다. 이 회사는 자사 AI 솔루션 AVIEW 9개 제품을 UAE, 사우다아라비아, 이집트 등 중동 지역 7개국에 대한 독점 판권을 부여받아 현지 의료기관에 제품을 공급하게 됐다. 계약 기간은 지난 10월 10일부터 2026년 10월 10일까지로 자동 갱신이다. 두바이 아부다비에 위치한 조기검진 전문병원 버질(burjeel)에서는 AVIEW를 구매 전 트라이얼 단계에 있다.
중동 시장에 진출한 기업들은 한국 기업의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당장 이익보단 해당 국가와 상생하는 사업 구조를 그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수출만 생각하지 않고, 중동 국가가 원하는 청년 인재 육성 등을 함께 고민해야 미국 등 굴지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조언이다. 베스핀글로벌 관계자는 “중동에서는 현지 IT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며 “단순히 수출만을 생각하지 말고, 현지 인프라와 교육 강화에 기여해 동반 성장을 하는 전략을 채택해야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