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그는 왜 '밀수' 현장에서 '메소드 박'이라고 불렸나 [인터뷰]
"메소드 박."
영화 '밀수'를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인터뷰에서 촬영 현장에서 배우 박정민을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완성된 '밀수'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혜수 역시 "박정민의 캐릭터 중 '밀수'가 최고"라고 극찬했다.
박정민은 '밀수'에서 장도리 역을 맡았다. 여기저기 떠돌다가 진숙(염정아)의 집에 머물며 막내로 뱃일을 도우며 살았다. 그러다 상황이 달라졌고, 밀수품을 건져 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심이 되었다. 가장 막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단숨에 올라선 이가 바로 장도리다. 야비하면서도 변칙적인 캐릭터, 그런데 장도리가 박정민을 만나며 묘한 시너지를 낸다. 악역인데 밉지 않고, 비열한데 웃게 된다. 이게 다 '메소드 박' 덕이다.
박정민은 '장도리'에 대해 "눈앞의 이익만 좇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변의 훈육 없이 떠돌다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채 자라버린 어른이죠. 그때그때 살아남는 방법을 쫓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연기할 때도 상황에 맞춰서 장도리가 했을 법한 선택을 찾아갔어요"라고 촬영 당시를 회상했다.
"장도리는 전과 후 모습의 변화가 큰 인물이잖아요. 그래도 과거의 장도리를 완전히 버리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그리고 악역이라고 해서 '나는 나쁜 놈 연기를 할 거야'라고 생각하기보다 자꾸 어긋난 선택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빠져 버린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빌드업을 해나간 것 같아요."
장도리를 연기하기 위해 박정민은 약 10kg이나 체중을 증량했다. 하지만 증량하는 데 힘든 점은 하나도 없었다는 그다. "몸을 만들려고 살을 찌우던 와중에 감독님께서 피팅할 때 살이 오른 모습을 보고 '이대로 나오는 건 어떠냐?'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죠. 이 영화 때문에 운동을 하고 있고, 살을 찌워야 근육을 만들 수 있어서 그렇게 10kg 정도 찌운 것 같은데, 다이어트를 안 해도 되는 상황이었죠."
"장도리 의상은 (김)혜수 선배님 레퍼런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패션잡지나 인터넷을 보시면서 좋은 이미지를 저장해 두신대요. '밀수' 때 장도리가 이런 옷을 입으면 어떨까? 하시면서 보내줏니 사진이 있었고요. 그중 고른 것이 영화 속에 담긴 장도리 스타일입니다. 처음 딱 장도리가 되어 나왔을 때 되게 신났어요. 걸친 모든 것들이 무기가 되어주는 느낌이랄까요."
박정민은 앞서 언론시사회에서 장도리의 마음에 대해 "겉으로는 옥분이를 좋아하지만, 마음속 깊숙이 연모하는 분이 따로 있지 않을까 싶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과연 장도리는 마음속 깊이 누구를 연모했을까.
"말하기 조심스러운데요, 제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연기한 건 진숙이(염정아)였어요. 다시 한번 보신다면, 장도리가 그렇게 변하고 나서도 진숙이를 보는 표정만은 살짝 달라요. 춘자(김혜수)나 다른 해녀들 볼 때와 조금 다르게 연기한 것 같아요."
남다른 액션 장면도 완성됐다. 장도리는 권상사(조인성)를 상대로 좁은 호텔 방에서 맞선다. 정정당당한 싸움은 아니었지만, 팽팽했다. 권상사를 상대로 혀를 날름거리는 장도리의 모습에 박정민은 류승완 감독의 아이디어라고, 류승완 감독은 박정민의 아이디어라고 서로를 높였(?)다.
"시나리오에 70%는 있었고요. 29%는 감독님께서 만들어 주셨고요. 한 1% 정도는 제가 한 것도 있지 않을까요. 감독님께서 만들어주신 게 많아요. 예를 들면 권상사가 '손 빼고 얘기하라'라고 하는데, 장도리가 '손은 원래 안 넣었는데?'라고 대답하잖아요. 이런 디테일함이 있어요. 찌질함과 지능이 낮은 건 다른 거잖아요. 액션 장면을 이틀 정도 찍었는데, 미리 합을 짜온 게 아니라서요. 체력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내가 나이 먹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세 번 하니 쇼파도 못 들겠더라고요."
박정민은 박찬욱 감독, 류승완 감독 등 우리나라에서 거장으로 손꼽히는 감독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며 스스로 느끼고 배운 지점도 있다.
"'밀수' 찍고 '헤어질 결심', '일장춘몽'도 찍고, '전란'도 찍으면서도 느끼는 게 확실히 있었어요. 감독님들께서 그 하나 어떤 것도 허투루 하지 않으시까요. 제가 덜렁덜렁 가면 들켜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중요하지 않은 씬이 없다고. 이제는 제가 뒤에 서서 대사가 없는 장면이라도 '내 역할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요. 감독님에게 디렉션을 받는 건 그다음 문제예요. 적어도 제가 촬영 현장에 슬리퍼 끌고 가는 게 없어진 것 같아요. '밀수'가, 두 감독님께서 저를 그렇게 만들어주셨어요. 방심하지 않게요."
사실 박정민은 영화 '파수꾼'에서부터 스크린에 진하고 선명한 그만의 족적을 남겨왔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슬리퍼를 끌고 갔다'는 말이 의아하게 들려온 이유다.
"사실 '대사가 없으니까' 생각하며 마음 편히 촬영장에 간 적도 있죠. 그런데 마음가짐에 따라서 그 장면이 바뀌어요. 중요하지 않다고 제가 생각하고 가면, 제가 아예 안 보여요. 그런데 제가 뒤에 작게 걸리는 장면이라도, 무언가 하고 있으면 그 장면이 풍성해져요. '정말 중요하지 않은 장면은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대세에 지장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채워서 만들어 줄 수 있는 배우의 준비 자세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 변화인 것 같아요."
"전혀 제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순간의 디렉션이 이 캐릭터를 완성 시켜줬거든요. 예를 들어 장도리가 변화를 겪고 첫 등장할 때 장면 있잖아요. 해녀들을 무시하는 듯한 부하들에게 '누나들한테 잘하라고 했지?'라고 한 마디 하는 거요. 사실 그게 부하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해녀들에게 위협적인 말이잖아요. 그러면서 엉성한 발차기를 해요. 그 발차기가 없었다면, 장도리가 '헐렁헐렁한 놈이네'라는 모습이 안 보일 텐데 그 발차기 덕에 캐릭터의 또 하나의 레이어가 생긴 거잖아요. 그런 걸 현장에서 겪으면서, 작은 행동 하나라도 관객들은 보고 있고, 그것이 내 캐릭터의 중첩이 되어주는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류승완 감독은 박정민을 '메소드 박'이라고 불렀구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화면에 잘 보일 때도, 잘 보이지 않을 때도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밀수' 현장에서 장도리로 존재했다. 그동안의 족적에 깨달음이 더해졌으니, 앞으로의 박정민은 얼마나 더 어마어마해질까. 연기, 연출, 글쓰기 등 꾸준하고 묵묵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이어갈 박정민에 대한 기대감이 더해졌다.
"그때그때 하는 것들이 저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이 하나씩이라도 있어요. 그 가르침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틀린 걸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재미있어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일을 어떻게 할지 모르잖아요. 기회가 있을 때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는 건 좋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얻는 재미들도 있고, 영감도 있고요. 그렇게 쌓여서 제가 되는 거겠죠. 저도 궁금합니다. 앞으로의 저에 대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