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한 분야를 30년 넘게 파면 이젠 더 이상 이룰 게 없지 않을까 싶지만, 35년 차 배우 최민식은 아직도 욕심이 많다고 말했다. 영화 '쉬리',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범죄와의 전쟁' 등 한국형 누아르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최민식은 또 다른 도전으로 OTT를 택했다. 무려 25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이었다.

'카지노'는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도박에 인생을 건 이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한 범죄 오락 영화는 아니다. 작품은 '인간의 욕망'에 포커스를 맞췄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란 한 시골 소년이 어떻게 필리핀 카지노의 왕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벌이는지 일련의 사건을 좇는다.

최민식은 '카지노'의 주인공 '차무식' 역을 맡았다. 이름처럼 '무식'하게 배짱으로 밀고 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모든 게 운으로만 작용하진 않았다. 똘똘한 두뇌와 육감적인 상황 판단력, 그리고 나름의 사업가적 기질도 있다. 마치 불나방처럼 자신이 불빛에 지져져 스러질 것을 알면서도 욕망에 다가가는 '차무식'이라는 인물을, 최민식은 그야말로 완벽한 싱크로율로 표현했다. 어찌 보면 최민식 그 자체인 인물 같았다. 강윤성 감독 역시 "최민식 선배님은 처음부터 '카지노'에 가장 잘 맞는 배우였다"고 말했을 정도다. 최민식은 그런 차무식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한 걸까.

"저는 평범함에 중점을 뒀어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우리 작품은 선과 악의 경계, 그걸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아요. 가장 평범한 사람도 굉장한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어요. 차무식도 내면의 욕망을 좇다 보니까 그런 무리를 만나게 되고, 또 돈과 권력을 추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늪에 빠지는 식으로 흘러가는 거죠. 인간의 다중성 그런 것들이 표현되면 좋겠다 싶었어요."

'카지노2'에서 차무식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믿었던 동생에게 살해당하고,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카지노' 초반부터 강조한 '화무십일홍',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그 메시지가 그대로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차무식의 허무한 죽음 탓에 최민식은 작품에 빠져있던 시청자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꽃잎이 떨어지듯 차무식이 퇴장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어요. 누아르적인 정서를 감안했을 때 총을 빠바방 맞았는데 나중에 살아나고 그렇게 상상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그냥 화끈하게 셔터를 내리는 게 좋겠다 했어요. 욕망으로 치닫는 삶의 결말을 보여주는 거죠. '화무십일홍'이라는 말 그대로에요. 열흘 붉은 꽃이 없어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욕망을 향해 치닫는 게 우리의 주제니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구질구질한 서사, 마무리적인 장치보다 그냥 화끈하게 가자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죠.(웃음)"

드라마 현장도 오랜만이었거니와 OTT 작품은 처음이었다. 최민식은 "현장은 다들 영화 스태프 하던 사람들이라 크게 다르진 않았다"면서도 작품을 마친 아쉬운 심정을 전하기도 했다. 해외 로케이션 스케줄 상 빠듯했던 시간, 맘처럼 따라주지 않았던 컨디션 등 악조건이 많았던 현장이었지만 최민식은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냈다.

"배우가 만족하는 게 어디 있겠어요. 개인적으로는 항상 아쉽고 그렇죠.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제가 그 수많은 분량을 정말 버겁게 했다는 거예요. 하루에 14개 신을 찍기도 해봤어요. 정말 영화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분량을 찍었고, 또 필리핀 촬영이다 보니까 먹고 자는 게 다 돈이잖아요. 한정된 시간 안에 소화해야 할 분량을 찍고 한국에 들어와야 해서 더더욱 힘들었죠."

"제작발표회 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정말 '카지노' 찍으면서 삼중고에 시달렸어요. 저 역시도 코로나를 피해 가지 못해서 필리핀 가기 전에 걸렸거든요. 저는 후유증도 되게 심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호흡기가 안 좋은데, 속된 말로 '이래서 가는구나' 싶을 정도로 후유증이 세게 왔어요. 냄새도 못 맡고 목도 쉬고, 완전히 무기력증에 빠져서. 또 한 겨울에서 한 여름 뙤약볕으로 가니 날씨 적응도 안되고, 마닐라 공항에 딱 내리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웃음)"

'카지노'는 시즌1 초반, 차무식의 과거 서사가 길다는 혹평도 있었다. 캐릭터 서사를 다지기 위함임은 알겠으나 그 분량 조절에 실패했다는 평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지노와 돈을 사이에 두고 얽히고설킨 캐릭터만 170명이 넘었다. 이런 서사성이 피로도를 높이기도 했다. 최민식 역시 같은 고민을 했다며 객관적으로 작품을 평가했다.

"두 번째로는 연출적인 문제이기도 했지만, 강윤성 감독, 동료 배우들하고도 항상 토론했어요. 인물들이 서사적으로 너무 많이 부딪힌다는 점 때문에요. 그래서 서사적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갔어야 했나 싶기도 했어요. 러닝타임에 대한 강박도 있었고,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하겠나 싶지만, 조금 조금씩 아쉬움이 남기도 해요."

"우리가 너무 과욕을 부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이거 미안한 얘기지만, 특히 어린 시절 부분. 우리가 필리핀에 있을 때 B팀이 한국에서 어린 시절 분량을 찍고 있었어요. 편집본 보면서 '이거 나중에 말 나올 거 같지 않아?' 하긴 했어요. 저도 그렇고, 강 감독도 많이 배웠을 거에요. 완급조절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걸요."

극 중 최민식은 아끼는 동생 '양정팔' 역의 이동휘, 코리아데스크 '오승훈' 역의 손석구와 가장 깊은 연결 고리를 갖는다. 최민식은 후배들의 모습을 보고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며 미소 지었다.

"후배들요? 너무 예쁘잖아요. 열심히들 하고, 속된 말로 자기 밥그릇 자기가 잘 챙겨 오니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딴 생각 안 하고 그 더위와 악조건 속에서 자기 배역을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보였어요. 현장에서 너무 심각하고 스트레스 받고 예민해지면 삑사리가 날 텐데, 서로 농담도 하면서 해나가니 분위기도 더 좋았죠."

"손석구 배우는 정말 훌륭한 친구예요. 처음에 대본을 보고 '고시공부하냐' 싶었어요. 그 정도로 치열하게 작품을 파더라고요. 나중엔 제가 '너 대본 좀 놔' 할 정도였어요. 석구는 멋을 부리는 것, 배우로서 허영을 부리는 게 아니라 '오승훈'이라는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점을 가지는 것부터 고민하더라고요. 그런 점들이 선배로서 봤을 때 '아주 제대로 가고 있네' 싶은 생각이 들었죠. 동휘도 마찬가지고, 다들 압박감이 심했던 것 같아요. 매 상황 상황에 던져지는 기분이었을 거예요. 후배들이 여러 사람과 맞부딪히면서 저에게 오니까 저 역시도 좋은 시너지가 났던 것 같아요."

'카지노'를 통해 OTT 작품에 도전한 최민식은 그래도 극장이 좋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얼마 전 영화관에서 열린 '카지노2' 흥행 기념 시사회에 참석한 최민식은 "역시 영화관에서 큰 화면으로 봐야 좋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OTT를 해보면서 세상이 변하고 있구나라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팬데믹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플랫폼의 형태도 바뀌는구나. 이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저는 극장이 좋은 게 사실이에요. 속일 수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극장 냄새가 좋고, 만든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한 공간에서 서로 교감할 때 참 말할 수 없는 쾌감이 있어요. OTT 제안이 또 오면 해야죠. 그런데 전 영화가 우선이에요."

올해로 한국 나이 62세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연기에 쏟았고, 이젠 한국 영화계를 이끄는 굵직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그다. 배우로서 일가를 이룬 지금에도 최민식은 연기자로서의 욕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저 욕심 많아요. 중년의 로맨스죠. 이혜영 씨 하고도 엊그제 술 한잔하면서 '혜영 씨 우리가 이젠 로맨스로 만나야 할 것 같아'했어요. 요새 너무 자극적인 얘기가 많고 그게 지겹더라고요. 이제는 좀 가족이 될 수 있고 서로가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휴먼스토리. 또 중년들의 사그라드는 사랑에 대한 것들, 감히 꽃피울 엄두도 안 나는 그런 사랑도 짠하고 아프잖아요. 맨날 찔러 죽이고 쏴 죽이고 하는 것보다 이젠 이 혼돈의 세상 속에서 그런 이야기가 필요한 때 같아요."

"격정 로맨스 아주 좋아해요. 감독이나 동료들 만나면 '격정 멜로 없어?' 늘 물어요.(웃음) 그러면 '형이 하면 격정 멜로가 아니라 걱정 멜로예요'하더라고요. 그거 제목 좋다! 유머러스하지 않나요? 코미디를 바탕으로 깔고 들어가면 안에 짠한 이야기가 있는 거죠. 예전엔 현대문학 당행복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다녔는데, 그런 단편 소설 같은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주판을 튕기면서 될지 안될지 걱정하는 게 아니라 리스크 부담이 적은, 그런 소품 같은 휴먼 드라마가 활성화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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