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타스캔들' 정경호가 전한 하찮美·전도연·마흔하나
비슷함이 늘 식상함을 동반하진 않는다. 근 몇 년간 '츤데레' 캐릭터를 소화해온 정경호는 비슷한 캐릭터 속에서도 차별점을 담아내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가 익숙해서 편안한 연기로 인생작을 새로 썼다. '일타 스캔들' 속 까칠하지만 깊이 내재된 인간미를 가진 '최치열'을 통해서다.
1년 간 최치열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가치만 1조 원. 일타 강사계에서도 톱클래스인 최치열은 밤낮없이 강의에 삶을 쏟는 인물이다. 늘 예민해져 있는 탓에 섭식 장애와 수면 장애까지 겪는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을 살던 최치열에게 한 줄기 빛이 닿는다. 우연히 맛본 '국가대표 반찬가게'의 음식이다.
그렇게 '밥정'에서 시작된 최치열과 남행선(전도연)의 러브스토리는 안방극장을 울고 웃겼다. 조카를 딸처럼 키우느라 억척스러워진 행선은 점점 사랑스러워졌고, 까칠했던 치열은 마음을 열고 사랑에 직진했다.
러브스토리가 깊어질수록 시청률도 상승했다. 첫 방송 4%로 시작한 작품은 6회차 만에 10%를 넘겼고, 최종회에선 17%로 자체 최고 기록을 넘겼다. 매 회 방송 다음날 아침이면 시청률 문자를 받아야 했다는 정경호는 대중의 뜨거운 사랑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오랜만에 인터뷰를 한다며 긴장한 모습으로 등장한 정경호는 "시청률이 잘 나와서 정말 황송해요. 보시는 분들께 좋은 드라마로 기억에 남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그런 것 같아요. 시청률에 막 연연하진 않았지만, 눈 뜨면 아침 7시 반부터 연락이 오더라고요.(웃음) 배우들도 그렇고 감독님들까지도 모두 단체 채팅방에서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라며 웃었다.
정경호는 치열의 캐릭터성보다도 '사람'에 집중해 '일타 스캔들'을 선택했다. 따뜻한 가족극으로 사랑받은 유제원 감독과 양희승 작가,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전도연의 조합이었다. 정경호는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제가 워낙 양희승 작가님 팬이기도 해요. 작가님 쓰신 건 최근 것까지도 다 봤고, 유제원 감독님과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끝나고 한 두어 번 술자리에서 뵀는데, 정석이 형, 대명이 형과도 친분이 있으셔서 알고 지냈거든요. 막상 저에게 대본이 왔고, 감독님과 작가님, 그리고 전도연 선배님과 제가 감히 함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도전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다양한 전문직을 소화했던 정경호는 이번엔 일타 강사 역을 맡았다. 1등 스타강사라는 존재, 그 세계가 생소했다고 말한 정경호는 직업적 전문성에 집중하며 최치열을 소화했다.
"일타 강사요? 그런 직업을 다룬 작품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조명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몰랐는데, 그들의 삶이 정말 놀랍더라고요. 그쪽 세계에서는 연예인의 삶을 사는 것과 비슷하잖아요. 환경이. 특히 맘 카페 그런 존재는 전혀 몰라서 대본 속 이야기가 새롭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가장 신경 쓴 점은 수학 공식을 외워야 한다는 거였어요.(웃음) 이해는 안 하겠다는 다짐 하에 외웠어요. 또 칠판에 쓰는 판서도 10번 정도 나오는데, 실제 일타 선생님께 배우고 집에서도 연습하면서 두 달 정도 시간을 들였어요."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수강생을 바라보며 쓰는 판서, 이 와중에 어려운 수학 공식들까지 외우고 익히며 체화했다.
"발차기는 원래 대본에도 있던 거예요. 애들 집중 시킨다고 한 거였는데 처음에는 '나이키'도 있었어요. 근데 작가님한테 '나이키는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자신 있는 거로 하세요' 하셔서 발차기를 선택한 거죠. 원래 발차기도 다리가 더 올라가는데, 옷이 꽉 껴서 그 정도만 올린 거예요.(웃음)"
"치열이만의 글씨체도 연구한 부분이에요. 중간에 수아가 '이거 치열쌤 글씨인데' 하는 부분이 있어서 리미트 표시나 숫자 2, 8, 소문자 a 쓸 때 나름대로 어떻게 해야 독특하게 쓸까. 그런 표기 방법 같은 것도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차별화되게 하려고 했죠."
극 초반 치열은 예민함의 끝판왕 인물이다. 섭식 장애로 밥만 먹으면 구토하기 일쑤, 게다가 수면 장애로 깊은 잠에 들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앞뒤 없이 예민한 건 아니다. 학생들을 향한 애정, 직업적 책임감은 투철하다. 정경호는 치열의 입체적인 모습 속에서도 인간미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 모습이 코믹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행선의 힘에 밀려 종잇장처럼 쓰러지는 치열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냈다. 온라인상에서는 '짤'로 만들어져 큰 화제를 모았다.
"치열이는 '일조원의 남자'에 섭식 장애라든지 불면증이 있다든지 하는 부분이 있지만, 저는 조금 더 인간미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민한 사람이지만 제가 잘 할 수 있는 '하찮미'를 더하면 더 사람다워질 것 같았거든요. 제가 수년간 예민하고 날카롭고 까칠하고 샤프한 역할을 해왔던 것 같아요. 거의 8년을요. 그래서 고민스러웠던 부분도 있었지만, 차별적으로 둘 수 있는 걸 고민했어요."
"바싹 마른 몸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의 8년째 바싹 마른 몸을 보여드린 것 같아요.(웃음) 이번에 더 마른 모습을 표현하기 수월했던 건. 이전에 연극에서 에이즈 환자 역할을 해서 마른 몸이 된 상태였거든요. 지금은 찌우고 있는 중이에요. 3kg쯤 찐 것 같아요."
정경호는 '전도연과의 호흡'을 묻는 질문을 500번 들었다고 했다. 아마 이번 종영 인터뷰까지 합치면 그 횟수는 더 넘을 터다. 정경호는 선망하던 인물과 같은 프레임에 잡히는 순간,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짜릿했고 신기했다고 했다. 전도연과의 호흡은 '말해 뭐해' 그 자체였다.
"제가 감히 전도연 선배님이랑 연기를 하는데 어떻게 케미가 안 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우려할 건 하나도 없었어요. 선배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모니터를 하러 쫄래쫄래 가서 저와 선배님이 투샷으로 담긴 모습을 계속 봤어요. 볼 때마다 놀랐어요. '내가 선배님과 같이 있다니' 하는 생각에.(웃음) 배운 점은, 선배님은 거짓말을 안 하세요. 저는 가끔 연기할 때 머릿속,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아도 '하고 넘어가야지' 하는 부분이 있는데, 선배님은 정말로 행선이처럼 표현하시더라고요. 되게 투명하신 분이고, (연기적으로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모습이 되게 놀라웠어요."
"저는 전도연 선배님이 진심으로 정말 좋아요. 이번에 같이 호흡을 맞추면서 '왜 내가 선배님 연기를 보면서 그렇게 환장을 했는지' 다시 느꼈어요. 선배님이 40년 넘게 일을 해오면서 가지고 있는 말투, 호흡, 웃음소리, 그런 변하지 않는 것들. 그 자체로서의 단단함, 그걸 유지할 수 있는 힘. 그런 걸 저도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걸 배웠어요."
올해로 데뷔 20년을 맞은 정경호는 꾸준히 연기를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사람을 꼽았다. 늘 좋은 이들이 곁에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잘 다지는 방법을 고민하는 평범한 40대의 모습도 보여줬다.
"되게 뻔한 이야기처럼 들리실 수 있겠지만, 제가 언제 전도연 선배님과 연기를 해볼 수 있을까요?(웃음) 늘 내가 언제, 감독님, 작가님, 이렇게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었어요. 그런 생각으로 나름대로 20년 동안 꾸준히 잘 버텨왔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작품을 해오다 보니 내가 아직 차오르지 않았는데 표현해야 하는 과정들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다음 작품에서는 내 자신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고, 그래야 앞으로도 수월하게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마흔하나라는 나이가 많지도, 적지도 않고 딱 중간 같아요. 가장 중간 나이에서 어떻게 잘 다져가야 하는가.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