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이' 그대로…김현주 [인터뷰]
*해당 인터뷰에는 '정이'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정이'는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타이틀로 쓴 경우다. 그런데 '정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오간다. '정이'는 근 미래의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히로인이 된 승리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그의 뇌는 복제되어 최고의 사이보그를 만드는 프로젝트의 출발선이 된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전쟁보다 다른(?) 용도의 '정이'가 필요하게 됐다.
김현주는 과거 드라마 '햇빛속으로'(1999), '덕이'(2000), '유리구두'(2002), '토지'(2004) 등의 작품에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에도 1년에 한 두편씩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다. 그런 김현주를 달리보게 한 것 은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연상호 감독의 어두운 세계관에서 김현주는 민혜진 변호사 역을 맡아 선을 위해 달렸다.
그 활약은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영화 '정이'에서 이어졌다. '정이' 속에 정(情)이 묻어날 수 있었던 것은 김현주의 섬세한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 중 사이보그의 모든 표정은 '김현주'에게서 시작됐다. 김현주가 연기한 표정을 베이스로 사이보그의 모습이 완성됐다. '정'을 느낄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김현주는 故 강수연과 모녀 호흡을 맞추며 또다른 '정'을 쌓았다. 그 결과 '정이'는 넷플릭스 글로벌 비영어권 영화 1위를 기록하는 등 이례적인 성과를 낳았다.
Q. '정이'가 넷플릭스 비영어권 영화 글로벌 1위라는 성과를 이뤘다. 신파 등의 이유로 국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남다른 성과임에 분명하다.
"좋은 소식을 듣고, 한결 기분 좋게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호불호에 대해 억울한 마음은 없어요. 각자 다른 마음으로, 다른 기대감으로 보셨을테니까요. 물론 만족과 불만족의 간극을 줄여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대중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일이지만, 모두 다 만족할 수는 없잖아요. 불호의 시선도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Q. '정이'는 체형 만으로도 강인한 느낌이었다. 외적으로 근육을 키우려는 노력도 있었나.
"몸을 많이 키웠어요. 팔뚝이 남자보다 굵을 정도였고요. 체형이 큰 편은 아니었는데, 수트를 입어도 풍겨지는 느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다행이었죠. 총기, 수트 등이 모두 무게가 있었거든요. 뛰고, 관절을 멋있게 움직이려면 근력이 있어야 했어요. 실제로 어깨도 좀 넓어졌고요. 지금 다시 줄이는 과정에 이습니다. 근력 운동을 몇 개월 정도 하면서 증량을 했어요. (웃음)"
Q. 사이보그 연기를 모두 해냈다고 들었다. 촬영하다 갑자기 멈추고 다시 이어가는 모습 등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그냥 하라고 하면 어색할 수 있었을텐데요. 감정을 가지고 하라니까 나름대로 개연성을 찾으려고 하다보니 덜 어색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깨어날 때마다 느낌이 조금 다르지만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기본 베이스는 '물 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다가, 버튼을 누르면 몰아서 숨을 쉬는 느낌'이었어요. 최대한 고통 속에서 깨어나려고 했고요, 멈추는 장면에서는 의식하지 않는 상태로 멈추다보니 최대한 이상한 표정으로 멈추고 싶었어요. 여러 명 있을 때를 제외하고 연구소에 매달려 있던 '정이'도 실제로 제가 매달려 있었어요. 와이어로 살짝 들려있는 느낌을 주고, 나중에 후반작업으로 미세한 움직임 등을 잡아주셨어요. 다른 사람들이 연기할 때 저는 멈추고 있었어요. CG로 잡아주긴 하지만, 현장에서 다 연기한 거고, 상반신도 그린수트 입고 임했어요."
Q. 다른 장면은 몰라도, 서현(故 강수연)의 볼에 로봇 '정이'가 볼을 부비는 장면은 정말 묘했다. 로봇인데, 정말 눈에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CG 기술력이 너무 대단하다고 느껴졌어요. 제가 한 표정이 그대로 비쳐지더라고요. 사실 기계고, 제 얼굴이 나오는 게 아니라, 액션 배우가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연상호 감독님은 CG로 하더라도 제 표정을 베이스로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모션 수트를 입고 직접 연기한 거예요. 당시 크게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정이' 무의식 속 희미한 행복을 표현해야 해서요. 그걸 故 강수연 선배님께서 잘 받아주신 덕에 완성된 장면 같아요."
Q. '정이'는 아이콘으로 소비되는 인물이다. 전쟁을 할 때에는 '승리의 아이콘'이었고, 그 이후에는 승리의 아이콘을 잊지 못하는 자들의 소비를 부추기는 피사체가 될 위기를 맞기도 한다.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계시지만, 과거 '국물이 끝내줘요' 같은 아이콘으로 살았던 분으로서 남다른 감정이입도 됐을 것 같다.
"저는 '정이'처럼 소비된 인물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런 것의 불편함과 회의감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게 이유모를 불만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모가 난 까칠함으로 표현되기도 했어요.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기도 했어요. 그런 시절을 지나온 제가 무한 반복의 실험 대상이 된 '정이'를 봤을 때, 짠했어요. 본인은 모르지만 켜켜이 쌓이고 있을 것 같았어요. 기억은 지워져도 반복되는 실험의 고단함은 매번 쌓일 것 같아서, 연기하면서 다른 감정이 들더라고요. 그 의식하지 못할 고단함이 '정이'에게 쌓여있다고 생각해서 그럼 미묘한 변화가 느껴지길 바랬어요. 서현(故 강수연)이도 저를 바라볼 때 그런 느낌이셨던 것 같아요. 어떤 장면에서 故 강수연 선배님께서 '난 너무 눈물날 것 같아'라고 하실 정도로 그 마음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Q. 앞서 "故 강수연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가까운 두 분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보고회 현장에 있던 배우 류경수와 연상호 감독님을 뜻하나.
"선배님께서 안 계셨다면, 이렇게 가까워지지 못했을 것 같아요. 제가 붙임성이 좋거나,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요. (감독님과) 나이가 비슷해서 더 불편한 느낌이. (웃음) '지옥' 때는 시리즈이지만, 현장이 영화 시스템으로 돌아갔거든요. 주로 드라마 현장에 있었던 저에겐 좀 어색했죠. 그래서 뒤에서 경청하고, 구경하고, 알아보는 모드라서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정이' 하면서 故 강수연 선배님이 워낙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가까워질 수 있었죠."
Q. '트롤리'에서는 극한의 감정을, '정이'와 '지옥'에서는 '배우 김현주'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것들에 대한 갈증이 있었나. 지치지 않는 원동력이 있는지 궁금하다.
"배우라면 누구나 다 갖고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걸 해보고 싶고요. 제가 드라마 쪽에서 활동하다보니, 변화를 준다고 해도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매체의 변화가 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고요. 매번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데요. '지옥' 때는 어느 순간 저 혼자 끌고 가는 것이 힘에 부치는 지점이 있어서 다같이 만들어갈 작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임하게 된 것 같아요. 작은 역할이라도 그런 작품에서 하고 싶었거든요. '트롤리'에서는 깊은 심리를 표현하는 것에서 제가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아서 선택했고, 재미있게 임했어요. 변화를 시작한 지점이 아직 몇 년 되지 않아서요. 아직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찍고 있는 '선산'을 마무리하고는, 휴식기를 좀 가지려고요. 제 원동력은 잘 쉬는 것이거든요. 잘 쉬고 나면, 잘 비워져서, 다시 또 시작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그것이 열정이 되기도 하고요. 쉬면서 갖게되는 관심들이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Q. 최근 SNS로 대중과 소통하는 지점도 인상깊었다. 팬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하시는 '정이'가는 행보더라.
"제가 SNS 같은 걸 전혀 안 하는 성향이거든요. 그런데 '땡스타그램(Thanks와 인스타그램의 줄임말)'이라고 해서 인증샷 용으로 계정을 만들었어요. 팬들이 선물을 많이 보내주시는데, 잘 받았는지 궁금하시잖아요. 팬카페에 간혹 올려주기도 하는데, 해외에서도 커피차를 보내주시기도 해서요. 그런 인증샷 용으로 만들었어요. 제 개인 사진 올리는 걸 잘 안하는데, 최근 궁금해하셔서 간헐적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제가 의외로 해외 팬이 좀 있어요. 한국 팬들은 좀 숨어계신 편이고, 해외 팬들은 드러내시고 활발한 경우가 많아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