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은채 "이번이 제 인생 연기면 안되죠…더 궁금한 배우 되고 싶어요"
"이번이 제 인생 연기면 안 되죠. 더 다른 옷들을 입어도 그게 저에게 잘 붙었으면 좋겠고, 계속해서 노력하고 또 계속 공부해야 해요. 어떤 이미지로 국한되기보다는 '이 사람이 다음 작품은 어떤 걸 선택할까?' 그런 게 궁금한 배우이고 싶어요."
정은채는 그리 대중적인 이미지를 가진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어느 배우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특유의 무드가 강점이다. 정은채는 '안나' 속 '현주'에 그런 자신의 매력을 가득 실었다.
'안나'는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자, 극 중 '유미'와 '현주' 모두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중 타이틀롤을 가진 이 작품에서 정은채는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나 우월한 인생을 즐기며 사는 '현주'를 연기했다. 그는 특유의 고급스러운 아우라에 호흡 하나까지 신경 쓴 연기로 현주를 완성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정은채는 '안나'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이게 어떻게 해서 나한테 왔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맡은 현주는 대중이 '정은채' 하면 떠올리는 이지적인 이미지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정은채는 자유로운 현장 분위기 속에서 여러 시도를 해볼 수 있었고, 그렇게 정은채만의 '현주'가 탄생했다.
"시나리오는 글이 너무 재밌어서 시작하고 끝을 다 읽고 덮을 때까지 너무 몰입하면서 봤던 기억이 있어요. 현주 캐릭터로 대본을 받았을 때는 의아하기도 하고 이런 캐릭터 제안은 처음이라 어떻게 하든 이 캐릭터를 내가 살릴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감독님 성향 자체가 전형적인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어요. 여러 가지 캐스팅 적인 부분에서도 저희가 봐왔던 배우들의 연기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훨씬 새롭게 접근해서 배우의 색다른 모습을 뽑아내는 걸 좋아하세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연기 변신을 할 수 있었고 그런 새로운 모습에 시청자분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현주는 부유한 집안, 돈으로 사다시피한 학위, 갤러리 대표라는 직함까지 모든 걸 가졌다. 그런 그에게 세상은 늘 쉬웠다. 환경에서 나오는 태생적인 여유로움과 배려심 없는 모습, 하지만 악의는 없는 그 순수함이 현주의 매력 포인트다. 정은채는 그런 현주의 입체성을 설득하기 위해 변주를 택했다.
"악의가 없다는 게 어찌 보면 사람을 좀 당혹스럽게 하잖아요. 그래서 현주가 유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작정을 하고 누구를 괴롭히면 상상이 되잖아요. 현주는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어떤 말을 내뱉을지 가늠이 안 가는 캐릭터라 그런 부분에 집중했어요. 순간순간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한 모습이 많이 보이길 원했죠."
"저는 사람들의 목소리 톤이나 말하는 방식, 그런 언어적인 느낌들이 그 사람을 되게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는데, 초반의 현주는 항상 들떠있잖아요. 어디론가 튀어 나갈 것 같은 캐릭터여서 그 점에 톤을 잡고 연기를 하고,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에 집중했어요. 후반부에는 지나간 세월을 담아야 해서 톤을 많이 다운시켰고요. 현주의 시간들을 톤으로도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현주의 행동이 유미를 자극하고 바꾼다. 현주는 그 자체로 유미의 기폭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현주와 유미가 대면하는 신에선 현주의 역할이 중요했다. 정은채는 평소엔 현장을 리드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유미와 만나는 장면에서만큼은 깃대를 잡아야 했다.
"제가 연기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현주가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신을 리드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대사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현주가 뭐든 한 번 말을 내뱉고 (신을) 끌고 가야 신이 정리가 된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 부분에 신경을 썼죠"
"사실 저는 리더십은 전혀 없는 스타일이라 어떤 현장에서도 조용히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번 현장은 달랐던 게 현주가 등장해야 신이 환기되고, 공기가 순환된다는 느낌을 주잖아요. 그런 에너지를 현장에서도 가져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현장 갈 때마다 좋은 에너지로 가서 편하게 있으려고 했어요. 제 연기 스타일이 갑자기 페이스오프 되는 게 아니라 감정선과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편이거든요."
매 작품, 캐릭터에 동화되려 노력하는 작업은 배우 개인에게도 큰 에너지 소모다. 사람 정은채로 존재할 때도 어느 정도는 캐릭터의 감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안나'를 마친 정은채에게 어떻게 에너지를 채우는지 물었다. 그는 이미 촬영을 마친 영화 두 편의 개봉과 애플tv+ '파친코2' 촬영을 기다리며 "충전 중"이라고 말했다.
"저는 I에요. 내향적인 게 조금 더 가깝긴 하죠. 혼자 있는 시간도 너무 좋아하고, 나가서 많은 사람과 호흡하기 전에는 꼭 저의 시간이 필요한 그런 성격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에너지가 계속 발생하는 그런 인간이 못 되는 것 같아서 그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제가 필요한 시간을 잘 가지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