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담] 김선호, 마음 담길 틈을 만들다
최근에 온라인상에서 '대충 살자, 김선호처럼'이라는 게시물이 화제가 됐다. 게시물에는 김선호의 작은 실수들이 담겨 있다. 2020년 크리스마스 인사에 날짜를 2021년으로 적고, 손편지 내용 중 한 글자를 빼먹기도 하고, 자신의 얼굴 위에 사인을 한 이미지 등이 담겨 있다. 김선호에게는 틈이 있다. 그런데 그 틈이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 틈은 시청자, 관객, 그리고 그를 보는 이의 마음이 담길 틈이기 때문이다.
배우 김선호도 그렇다. 틈을 만들어 둔다. 드라마 '스타트업' 속 한지평도 그랬다. 한지평은 투자의 귀재로,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다른 드라마 속 '실장님'들은 완벽했다.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김선호가 그린 한지평은 달랐다.
분명 한지평은 완벽주의자가 될 만한 인물이었지만, 김선호는 그런 한지평을 가득 채우기보다 틈을 만들었다. 그 틈은 AI 스피커 영실이와의 대화 속에서, 원덕(김해숙)과의 대화 속에서, 달미(배수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리 바라보게 되는 눈빛 속에서, 심지어 연적이지만 능력있는 남도산(남주혁)과의 관계에서까지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틈에는 달미의 마음 대신 시청자들의 마음이 담겼다. 모두가 원덕(김해숙)의 마음이 되어 "더는 외로워지지 말아라, 지평아"를 외쳤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연극 '얼음'에서도 이어진다.
연극 '얼음'은 조금 특별한 지점의 작품이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사람은 두 사람인데 삼인극처럼 전개된다. 등장하는 인물은 두 명의 형사다. 베테랑인 노련한 형사1(박호산)과 뜨거운 피의 젊은 형사2(김선호)다. 그리고 빈 의자로 상징되는 용의자 한 명이 등장한다. 배경은 취조실. 그 속에서 두명의 형사는 용의자 강민혁 군의 자백을 받아내고자 그를 취조한다.
사건은 스무살 여대생 유영지 살인사건. 유영지는 살해된 후 여섯토막으로 잘라져 이곳저곳에 버려졌다. 열여덟 살 고등학생 강민혁 군은 유영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 생일선물을 건네준 인물. 과연 그는 유영지를 죽인 진범일까. 관객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강민혁 군을 두 명의 형사를 통해 듣고 보며 사건의 전말을 함께 파헤치게 된다.
제목처럼 마치 형체가 없는 '얼음' 같다. '얼음'의 모양은 이를 담아내는 그릇의 모양이다. 네모 그릇에 담긴 물을 얼리면, 네모난 얼음이, 동그란 그릇에 담긴 물은 동그란 모양이 된다. 두 명의 형사는 얼음을 담는 그릇이 된다. 강민혁 군이 어떤 모양인지 결정하는 것이 마치 형사들이라는 듯. 그래서 등장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극이 품고 있는 은유 그 자체다.
형사1(박호산)은 강민혁 군을 달래며 말을 이끌어내려 한다. 김선호가 맡은 형사2는 다르다. "전교 1, 2등 하는데 왜 미대에 가려고 하냐", "3살 때 집 나간 엄마, 알코올중독자인 아빠, 좋아 좋아"라며 그림이 딱 나온다고 능청스레 그를 밀어붙인다. 그러면서도 화훼농장의 맞춤법을 '화해'라고 쓰고, AB형에 밑줄을, 물고기자리를 굳이 추가해 놓는 과학 수사와는 거리가 먼, 어딘가 모자란(?)듯한 틈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다그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정보들이 전해진다. 김선호가 전하는 방식은 액션보다 리액션이다. 보이지 않는 강민혁의 말에 예민하게 리액션한다. 용의자가 내뱉는 한숨, 눈물, 떨어진 시선, 격해진 감정, 그리고 현장을 떠올리기 위한 재연에서 갑작스러운 뽀뽀까지. 이 모든 것은 김선호를 통해 보이고 들린다.
김선호가 만든 형사2의 빈틈은 보이지 않는 강민혁 군까지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 과정에 관객의 마음이 담긴다. 그렇게 담긴 관객의 마음은 함께 추리를 하도록 만든다. 90여분 동안 한 장소에서 단 두 사람이 이끌어가는 연극에 눈과 맘을 뗄 수 없는 이유다.
김선호는 2009년 연극 '뉴 보잉보잉'으로 데뷔했다. 당시 나이 24세. 이후 '옥탑방 고양이', '거미여인의 키스', '클로저'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연극계의 아이돌', '대학로 아이돌'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1박 2일'에서 당시의 인기를 직접 김선호의 말을 빌리면 그의 출연작에 관객이 "입구에서 도로까지 줄을 서주셨다. 차가 못 지나갈 정도" 였다.
브라운관에서 그를 만난 것은 2017년 방송된 KBS2 '김과장'에서였다. 이후 드라마 '최강 배달꾼', '투깝스', '미치겠다, 너땜에!', '백일의 낭군님' 등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였다. 그리고 2019년 KBS 예능프로그램 '1박 2일 시즌4'에 합류했고, 2020년 드라마 '스타트업'을 통해 '역대급 서브남주'라는 극찬을 받으며 대세 중 대세로 거듭났다.
간단한 것 같다. 하지만, 배우 김선호가 보여준 캐릭터는 한 명 한 명이 다 진하게 남아있다. 때로는 너무 일상적이고 일상적이라서 내 친구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고('미치겠다, 너땜에!' 김래완), 선 넘는 허세와 몸짓에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게, 응원하게 만들었으며('투깝스' 공수창), 홍심(남지현)을 위해 홍등을 띄우면서 자신의 소원도 작게 하나 적어 놓은 어딘가 헐겁고 알뜰한 그는 "운명"이라고 믿고 싶게 만들었다('백일의 낭군님' 정제윤). 이 모든 것이 김선호가 입은 캐릭터의 옷에 시청자의 마음이 담기게 한 것.
연극 무대 위 김선호는 더 자유롭다. 그는 무대 위에 있지만,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용의자가 된 소년 강민혁을 다그치며 취조를 하지만, 그 자체가 상황을 만든다. '소리 반, 공기 반'이라도 넣은 듯 하다. 1인 2역으로 깜짝 등장한 박순경 역시 자연스럽다. 연극의 중요한 정보를 주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웃음을 놓치지 않는다. 정보를 주어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등장하지 않고, 느슨하게 등장해 관객의 마음 줄 틈을 만들어 놓는다. 연극 '얼음'이 가진 내면의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김선호만의 방식이 아닐까.
코로나 19로 인해 거리두며 앉은 객석에서 환호성을 낼 수는 없었지만, 있는 힘껏 박수를 쳤다. 연극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던 이가 브라운관의 스타가 됐다. 그리고 다시 서게된 연극 '얼음' 무대에서 '역시는 역시'라며 김선호에게 진심의 박수를 전하게 된다. 앞으로의 김선호가 어떤 매체에서도, 장르에서도, 그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낼 거라는 강한 믿음을 심어준 그의 행보를 더 기대하게 된다.
한편, 배우 김선호와 함께 배우 이창용, 신성민이 형사2 역에, 배우 박호산과 함께 배우 정웅인, 이철민이 형사1 역에 각각 트리플 캐스팅 됐다. 연극 '얼음'은 장진 감독이 연출한 작품. 이는 1월 8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막을 올렸다. 티켓은 인터파크 티켓, NHN티켓링크, 세종문화티켓을 통해 예매 가능하다. 14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9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