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왜 한글 사용을 금지했을까?
1443년 창제된 한글은 현재 ‘세계 최고의 알파벳’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지만, 한글이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양반들은 한글을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의 ‘암글’이라 부르며 비하했고, 세종대왕의 후손인 왕이 한글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바로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산군’에 의해서다.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한양에는 그의 악행을 비방하는 벽서가 붙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보고 크게 노한 연산군은 한글로 쓰인 책을 모두 불태우라는 명과 함께 ‘언문(한글) 금지령’을 내린다. 연산군을 비방한 벽서가 한글로 쓰였다는 이유에서다.
언문 금지령에는 한글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말고, 이미 배운 자들도 한글을 쓰지 말라는 것과 함께 한글을 아는 자들을 관청에 고발하고, 한글을 아는 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으면 그 이웃까지 처벌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하지만 연산군의 한글 탄압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언문 금지령은 사실상 비방 벽보를 쓴 범인을 잡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언문을 아는 사람들의 글씨와 벽서에 쓰인 글씨체를 대조해 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벽서를 쓴 범인을 잡지 못했다.
이후 연산군은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연산군 시절의 궁궐 기생 ‘흥청’의 음악 교본이나 달력 등을 한글로 번역해 사용하게 했으며, 한글을 아는 사람을 뽑아 관리로 채용하는 등 폐위 전까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