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꽃에도 평등한 시선을 보내다

Imaga Mundi. 지금까지 1백20개국에서 2만 명이 넘는 세계 곳곳의 동시대 아티스트들이 작은 캔버스 작업으로 참여한 글로벌 프로젝트. 이마고 문디 컬렉션은 여러 조합으로 세계 여기저기로 '전시 여행'을 다닌다.

때로 혁신은 스스로의 경계를 뛰어넘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한때 파격적인 광고 비주얼과 메시지로 유명했던 베네통 그룹의 창업자 루치아노 베네통은 몇 년 전 경영 전선을 떠난 뒤 순수한 호기심으로 흥미로운 현대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우편엽서 크기만 한 앙증맞은 사각 캔버스에 세계 곳곳에 흩어져 ‘나만의’ 작업을 펼치고 있는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예술혼을 소박하지만 의미 있게 담아내는 ‘이마고 문디(Imago Mundi)’ 프로젝트. 거창하지 않은 개인의 컬렉션이지만 ‘다문화적포용’이라는 점에서 작은 혁신이라 불릴 만하다.
“지금까지 세계 미술의 중심은 서구였지만 세기말 현대미술의 중심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1996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전시 총감독을 맡은 넬슨 아귈라(Nelson Aguilar)는 이런말을 했다고 한다. ‘세계화’라는 키워드가 뜨겁게 달아올랐을 무렵 구미 지역에 쏠린 세계 미술의 무게중심이 점차 이동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이는 비단 현대미술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를 주도하는 소프트 파워의 핵심 축인 ‘문화’ 전반에 걸친 문제일 것이다. 지구상의 다양한 문화 생태계가 저마다 목소리를 평등하게 내면서 잠재력 깃든 창조성의 날개를 자유롭게 펴는 세상을 꿈꾸고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이슈일 테고 말이다.

세상은 정말로 다양한 문화 생태계로 진화하는 걸까?

베네통 그룹의 설립자 루치아노 베네통 회장이 2012년 은퇴한 뒤 현대미술을 둘러싼 문화적 경계를 허물고 신진 작가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를 후원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글로벌 프로젝트 ‘이마고 문디(Imago Mundi)’는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사진은 2015년 비엔나에서 열린 전시 풍경.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현실 세계의 모습이 엄청나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일부 국가나 지역의 대중문화와 예술이 보다 선망되고 더 큰 발언권을 발휘하는 듯한 판도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미국이나 영국처럼 메인 스트림을 이끄는 소수 문화 권력 자체가 시들지는 않겠지만, 신흥 세력이 부상하고 있기에 적어도 유일한 지배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진단도 내놓는다. 디지털 혁명으로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이 시대에는 취향이 파편화되면서 적어도 주류가 여럿이 될 수 있다는 ‘중심의 복수화’를 말하는 것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중심은 흐트러지거나 분열되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복제’되는 것뿐이라고. 경계의 붕괴나 융합, 혼종 같은 키워드도 그저 주류가 만들어낸 ‘유행’처럼 여기저기에서 반복되고 있기에 진정한 다양성이 뿌리를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획일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주장이다. 현대미술이라는 영역도 결국은 경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산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지라, 비즈니스 생태계의 맥락에서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의견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비판의 날을 가장 예리하게 세우는 이들도 미술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아티스트든 컬렉터든 비평가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건 아마도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벗고 ‘나’를 찾고자 하는 의지, 그걸 억압하는 편견이나 주류 질서에 반항하는 정신이 예술의 중요한 본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변방과 주류 세력의 다툼과 충돌이라든지, 패러다임의 전환, 헤게모니의 이동 같은 거창한 단어를 동원하지 않아도 필요하다면 스스로 경계를 허물며 앞으로 나아가는 ‘실천’을 하면서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이들도 있다.

이탈리아 북부 트레비소에 위치한 패션 그룹 베네통의 커뮤니케이션 센터인 파브리카에서 만난 '루치아노 베네통(Luciano Benetton)'. 베네통 창업자인 그는 은퇴 후 세계 곳곳에 있는 동시대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으로 우편 엽서 크기의 작은 캔버스를 활용한 비영리 현대미술 프로젝트인 ‘이마고 문디(Mundi)’를 펼치고 있다.

그런 인물들 중 지금 소개할 주인공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옷이 아니라 ‘인종차별’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발하고 파격적인 광고로 유명한 글로벌 기업 베네통 그룹의 창업자 루치아노 베네통(Luciano Benetton)이다.

하지만 그를 아트 비즈니스의 혁신을 이끄는 기업가나 대단한 컬렉션을 꾸리는 슈퍼리치로 소개하는건 아니다. 루치아노 베네통은 이미 2012년 비즈니스계에서 은퇴했고, 이후 줄곧 나름의 아트 프로젝트에 심취해 있다. ‘세계의 이미지’라는 뜻의 ‘이마고 문디(Imago Mundi)’ 프로젝트다. 어찌 보면 일종의 컬렉션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결코 평범한 의미의 컬렉션이 아니다.

‘소박하지만 거대한’ 다문화적 글로벌 아트 프로젝트

이마고 문디 컬렉션이 소장돼 있는 베네통 커뮤니케이션 연구 센터 파브리카의 내부.

10X12cm 크기의 앙증맞은 사각 캔버스. 컨템퍼러리 아트 느낌이 물씬 나는 회화, 낙서 같은 스케치도 있고, 서체를 살린 그래픽 작업을 담은 경우도 있다. 작지만 나름의 입체감을 자랑하는 조각이 들어 있는 캔버스도 있다. 이처럼 다채로운 작품을 담은 귀여운 캔버스가 2m가 채 안 되는 커다란 나무틀 칸칸에 하나씩 들어앉아 있다. 가로 6칸, 세로 6칸이다.
검은 바탕에 자연스러운 나무 색깔로 칸이 나누어져 있어 작품이 나름 부각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언뜻 보면 그냥 작은 그림이나 디자인 소품을 한데 모아놓은, 소박하지만 뭔가 흥미로운 컬렉션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컬렉션의 스케일은 굉장히 크다. 나라별로 아티스트들과 협업해 1백 점이 훌쩍 넘는 작품을 담은 사각 캔버스를 차곡차곡 수집하면서 ‘국가별 컬렉션’을 만들어온 지도 벌써 3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이마고 문디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가는 1백20여 개국, 컬렉션 수로는 1백50여 개나 된다. 참여한 아티스트 숫자는 무려 2만 명이 넘는다. 참으로 베네통답게 글로벌 스케일의 아트 프로젝트인 것이다. 게다가 갈수록 참여자가 늘어나면서 꽤 빠르게 커져가는 컬렉션이기도 하다.

세계 곳곳에서 온 '젊은피'를 지원하는 혁신의 전당으로도 유명한 베네통 커뮤니케이션 연구 센터 파브리카는 루치아노 베네통이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우연히 보고는 마음에 들어해 베네치아 스타일의 빌라 미넬리를 확장하는 작업을 맡겨 1990년대 중반 재탄생한 곳이다. 이를 계기로 안도 다다오는 유럽에서 큰 인지도를 얻었다.

어째서 이런 프로젝트를 하게 된 걸까? 분명 그에게는 수준 높은 미술품이나 디자인 가구, 오브제가 넘쳐날 듯한데 말이다. 지난해 베니스 인근의 트레비소(Treviso)에 자리 잡은 베네통의 커뮤니케이션 연구 센터 파브리카에 갔다가 우연히 이마고 문디에 대해 듣고는 궁금증이 솟았고,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1년 뒤 루치아노 베네통을 찾아갔다. 굵게 컬이 진 백발의 루치아노는 80대답지 않게 곧은 자세와 맑은 혈색의 소유자였다. 온화한 미소와 차분한 말투가 ‘이탈리아인’같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인상적인 그는 이마고 문디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2008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남미 출장으로 에콰도르에 들렀는데, 미겔 베탕쿠르(Miguel Betancourt)라는 아티스트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습니다. 그 작가는 제게 명함 대신 작은 캔버스 크기의 그림을 건넸는데, 거기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순전히 우연이었고, 당시에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기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하지는 않았지만요.”
하지만 그는 이 아이디어를 늘 마음에 담아두었고, 2012년 은퇴하면서 프로젝트에 본격 착수했다. 작은 캔버스를 보내주고 거기에 담을 작품을 창작하게 한다면 아티스트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뿐더러 그 자신으로서도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스타일을 지닌 아티스트를 알게 되고 교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협업이라고 생각했다.

2014년 세네갈 다카르 비엔날레에서 열린 이마고 문디 전시

“참가자 중에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재능 있는 신진 아티스트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들이죠. 그런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거든요. 캔버스가 작아서 큰 작품을 하는 작가들에겐 때로 제약이 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전시 공간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적어도 이마고 문디 세계에서는 정말로 모두가 평등하다. 실제로 내로라하는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나 자하 하디드 같은 아티스트들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똑같이 10X12cm 크기의 캔버스에 작품을 담아 보냈다. 스타 작가든 소말리아의 무명 작가든 이 프로젝트에서만큼은 ‘브랜드’가 아니라 그저 ‘작품’만으로 평가받고 주목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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